‘일타스캔들’ 로코 이어 ‘길복순’ 액션까지…“거봐, 내가 할 수 있다 그랬지” 온몸으로 외쳐
로맨틱 코미디부터 정통 액션까지 고작 두어 달 사이에 백팔십도 다른 얼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성공까지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배우 연차 30년을 훌쩍 넘기고도 대중들의 반응을 앞두고는 신인처럼 초조할 수밖에 없었던 배우 전도연(50)은 이제야 한시름을 놓은 듯했다. 인터뷰 당일 오전, 그의 첫 넷플릭스 도전작인 영화 ‘길복순’이 공개 사흘 만에 영화(비영어) 부문 글로벌 TOP(톱)10 1위에 올랐다는 낭보가 전해진 참이었다. 쏟아지는 축하에 활짝 웃는 얼굴로 답한 전도연은 처음 ‘길복순’이 자신에게 주어지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산이 100억 원이 넘는다는 말에 사실 불안했어요. 현실적으로 전도연이 나온다면 투자가 안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건 제가 해낼 수 있을지 문제가 아니라 이게 작품적으로 나올 수 있을지 의심이었죠. 그래서 변성현 감독님께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 제가 아니라 젊은 친구랑 해도 된다’ 그랬는데 감독님이 ‘이건 전도연을 놓고 쓴 거라 전도연이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약한 말씀 안 해주셨으면 좋겠다. 저 힘 빠진다’ 그러시더라고요(웃음). 그 말씀이 너무 감사했기에 촬영 들어가면서 ‘내가 부서져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건 꼭 해야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과물로 나오니 반응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걸 보고 그랬어요. ‘거봐, 내가 할 수 있다 그랬지’. 제 스스로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이기도 했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은 청부살인업계의 전설적인 킬러 길복순이 자신이 속한 킬러 회사 MK ENT.와의 재계약을 앞두고 죽어야 하거나, 또는 죽여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대결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후배 킬러들에게 오를 수 없는 산으로 묘사되는 길복순이지만 집에서는 사춘기 딸에게 쩔쩔매는 싱글맘이라는 이중생활을 하는 모습이 처음 시놉시스를 받은 전도연의 마음에도 와 닿았다고 했다. 그 역시 현장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깍듯한 대접을 받을 대선배지만 집에선 하나밖에 없는 딸과 지지고 볶을 수밖에 없는 평범한 엄마인 덕이었다.
“길복순처럼 저도 일터에서의 전도연과 집에서의 제 모습이 달라요. 집에선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쩔쩔매는 엄마거든요. 변성현 감독님도 그 간극을 흥미로워하셨던 것 같아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스토리가 있었던 건 아닌데 그런 제 모습을 녹여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셨대요. 저도 여태까지 엄마 역할을 몇 번 했었는데 ‘길복순’에서의 모녀는 가장 사실적인 엄마와 딸의 관계였던 것 같아요. 엄마로서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고 싶고, 엄마와 딸이기 때문에 비밀 없이 서로를 다 알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론 그럴 수 없잖아요. 그런 현실적인 관계가 담긴 게 바로 ‘길복순’인 거죠.”
비현실적인 배경 설정 안에 현실적인 인간관계가 담겨 있는 만큼 ‘길복순’은 100% 액션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영화라기보단 휴먼 드라마적 요소도 강한 작품이다. 몸으로 하는 액션 신을 소화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와 가정을 오가며 번갈아 요동치는 감정 연기도 도맡아야 했던 만큼 길복순을 연기한 전도연은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고민은 종종 변성현 감독과의 마찰로도 이어졌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촬영 초에는 한 번 제대로 싸우기도 했었다고.
“변 감독님 방식이 배우를 약간 가둬 놓고 찍는 식이거든요. 설경구 씨도 (변 감독과) 처음에 좀 많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첫 촬영 날 제가 직접 당해보니 좀 답답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감독님께 ‘배우의 감정이 여기까진 갈 건데 그건 존중해줘야죠’ 했더니 감독님도 끝까지 안 굽히시는 거예요.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건 여기까지예요’ 하고 명확하게 의도를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따라갔죠(웃음). 나중엔 궁금해졌거든요. 과연 어떻게 내 동선이나 감정을 풀어냈을지. 그런데 그날 촬영분을 모니터링했더니 ‘감독님 말이 맞았구나’ 깨닫게 되더라고요.”
극 중 살인청부회사 MK ENT.의 대표이자 길복순이 킬러의 길을 걷게 만든 스승 역할을 하는 차민규 역의 설경구는 전도연은 물론, 변성현 감독과도 연이 깊다. 전도연과는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 ‘생일’(2019) ‘심장소리’(2022)에 이어 네 번째 호흡이고, 변성현 감독과는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킹메이커’(2022)에 이어 세 번째로 함께했다. 아무래도 변 감독과 더 오래 시간을 보낸 설경구가 나름대로 조언을 해줬을 법도 한데, 전도연은 “우리는 서로 조언해주는 사이가 아니”라는 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저를 많이 응원해주셨죠, 설경구 배우님이(웃음). 제가 보는 설경구 배우는 ‘오르지 못할 산’이라고 생각해요. 다 올랐다고 생각하면 그 위에 또 뭐가 있고, 오르다 보면 또 새로운 게 느껴지는 배우거든요. 같이 세 작품을 함께하면서 ‘이제 설경구 배우에게 궁금한 게 더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그걸 또 느낀 거예요. 다음 작품을 같이 하게 된다면 ‘이번엔 어떤 설경구라는 산을 오르게 될까’ 기대하겠죠.”
남배우들에겐 잘 주어지지 않지만, 나이와 연차가 어느 정도 찬 여배우에게만큼은 유독 “후배 여배우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곤 했다. 선배 여배우가 먼저 경험한 자리를 후배 여배우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양보 아닌 양보, 배려 아닌 배려가 있을 수 있냐는 요지인데, 이 질문에 전도연은 “제가 뭘 양보 해줘야 하냐”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극장가가 안 좋긴 하지만 이제 OTT를 통해 많은 작품들이 생겨나다 보니 젊은 후배 배우들은 정말 다양한 장르, 많은 작품을 할 수 있게 됐잖아요? 오히려 저는 그게 부럽거든요(웃음). 사실 우리 직업이란 게 누군가 양보하는 직업은 아니에요. 저도 극 중에서 제 딸 재영이 역으로 나오는 (김)시아 양이랑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선후배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동료다.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게 좋다’고 말해줬어요. 카메라 앞에선 다 라이벌이니까 서로 양보, 배려 이런 관계는 아닌 거죠(웃음).”
전도연은 앞선 작품에서 먼저 나이로 한 차례 꼬투리를 잡혔었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일타스캔들’의 여주인공으로 그가 낙점됐다는 이야기에 불필요하게 흰 눈을 뜨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탓이다. 부정적인 결말을 바랐던 이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일타스캔들’은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갈아 치우며 승승장구했고, 전도연에겐 새롭게 1020 딸 같은 어린 팬들이 생겼다. “전도연이란 배우를 이제야 알게 돼서, 너무 늦게 팬이 돼서 죄송하다”며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 쓴 팬레터를 보내왔다는 팬들을 보며 전도연은 무한한 고마움과 함께 다시 한 번 “봐, 내가 할 수 있다 그랬잖아”라는 뿌듯함을 느꼈다고.
“‘일타스캔들’ 때 그런(로코 출연에 부정적인) 기사나 이야기를 봤을 때 정말 깜짝 놀라긴 했죠. 내가 선입관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이라는데, 내가 그걸 의식을 해야 하나? 저는 스스로 의식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좀 답답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난 앞으로 두 번 다시 로코를 할 수 없어’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도 다른 형식의 로코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 하게 되니까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