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입비 지각납부와 임금 논란 딛고 4강 PO까지 진출…적장 김상식도 “감동이었다” 찬사
플레이오프를 거쳐 챔피언결정전을 앞두고 있는 KBL에도 '감동 농구'가 펼쳐졌다. 고양 캐롯 점퍼스의 이야기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많은 기대를 받으며 창단했으나 가입비 미납, 임금 체불 등 농구계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구단이다. 다만 선수단은 큰 박수를 받고 있다. 캐롯 선수들은 갖가지 악재를 딛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4강에서도 맹렬히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역대 KBL 그 어느 팀보다 '영화 같은' 시즌을 치렀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시즌
데이원자산운용이 고양 오리온 구단을 인수, 해체 후 재창단 과정을 거쳐 캐롯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했다. 농구계에선 이전에 없던 형태의 구단이었다. 구단은 KBO리그의 키움 히어로즈를 모델로 제시했다. 구단명 역시 네이밍 스폰서를 활용했다. 성대한 창단식이 진행됐으며 구단 대표직은 '농구 대통령' 허재가 맡았다. 그의 후광에 공중파 예능프로그램 카메라가 따라 붙었고 이전의 창원 LG가 그랬듯 구단의 인기가 높아졌다.
순조로울 것만 같았던 이들의 행보는 개막 이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KBL 가입금 납부 기한이 다가왔음에도 움직임이 없어 리그에 참가하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납부 기한 하루 전에 약속을 지켜 리그 참가는 정상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납부 금액은 전체 15억 원 중 일부인 5억 원이었다.
이후에도 계속 구단 재정 문제에 대한 잡음이 터져 나왔다. 구단 인수 과정도 원만하지 못했다. KBL의 연맹 가입 승인도 한 차례 보류됐다. 오리온 측은 인수 대금을 제때 받지 못했고 선수단과 직원들의 임금이 체불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기업 대우조선해양건설의 재정 문제도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캐롯손해보험은 네이밍 스폰서를 조기 종료했다.
정규시즌 막판, 논란이 뜨거워졌다. 앞서 가입금 5억 원만 분할 납부한 캐롯 구단이 나머지 금액 10억 원을 시즌 말미까지 납부하지 못한 것이다. KBL은 정해진 기한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이들의 플레이오프 참가를 불허했다. 캐롯의 가입금 납부 여부에 따라 7위 팀도 플레이오프에 참가할 수 있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시즌 막판, ‘7위 쟁탈전’이라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캐롯은 가까스로 기일 하루 전에야 10억 원을 냈다. 팬들은 ‘9억 원까지 마련됐다’는 등 구단 사정을 마치 생중계처럼 접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예상 뒤엎고 PO 진출
어렵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오리온에서 캐롯으로 간판이 바뀌는 과정에서 주요 전력이 빠져나갔다. KBL 우승 2회를 달성한 '명장' 김승기 감독에게도 어려운 시즌이 될 것으로 관측됐다.
오리온 시절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승현은 FA 자격을 얻어 팀을 떠났다. 또 다른 팀 내 스타플레이어 이대성을 현금 트레이드로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보냈다. 국가대표기도 한 이들은 팀의 백코트와 프런트코트의 핵심이자 리그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자원이다. 김승기 감독은 이들 대신 전력 보강으로 안양 KGC인삼공사에서 호흡을 맞추던 슈터 전성현을 FA로 영입했다. 캐롯은 전성현 외 이렇다 할 보강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캐롯의 전력을 두고 긍정적인 평가는 많지 않았다. 오리온 시절인 전 시즌 승률 5할을 맞추며 5위로 플레이오프에 나섰지만 전력의 두 기둥을 잃었기에 많은 전문가들은 캐롯의 6강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캐롯은 이 같은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선전을 이어갔다. FA로 합류한 전성현은 리그 MVP 경쟁을 할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프로 2년 차를 맞은 이정현은 리그를 대표하는 가드로 성장했다.
시즌 중 고비도 있었다. 에이스 전성현이 스트레스 등으로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기는 부상을 안았다. 김승기 감독과 좋은 궁합을 보이던 외국인 선수 데이비드 사이먼은 무릎 연골 부상을 입고 시즌 도중 팀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 시점 캐롯의 순위는 5위였고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따냈다.
#PO에서 이어진 '감동 농구'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캐롯의 전망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KBL 가입금 완납으로 경기는 치르게 됐으나 문제가 산적했다. 선수들은 기존 임금에 더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따른 인센티브 등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 현대모비스와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패배를 안았다. 이어진 마음고생에 의욕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시즌 내내 고군분투해 온 캐롯 선수들의 열정도 6강에서 멈출 것으로 보였다. 에이스 전성현은 부상 여파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앞두고선 시즌 중 카드값이 밀린 적이 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해 안타까움을 샀다.
하지만 캐롯은 2차전부터 반격에 나섰다. 이정현이 34점을 퍼부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3차전부터는 에이스 전성현이 돌아와 온전치 못 한 몸상태임에도 15분 내외를 활약하며 힘을 보탰다. 외국인 선수 디드릭 로슨은 정규시즌을 넘어서는 집중력을 선보였다. 캐롯은 시리즈 전적 3-2로 현대모비스를 누르고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정규리그 우승팀 안양 KGC인삼공사였다. 김승기 감독과 전성현의 직전 시즌 소속팀이었기에 매치업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승부의 추는 기운 듯 보였다. KGC인삼공사는 정규시즌 내내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시즌 중 열린 동아시아슈퍼리그(EASL)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반면 6강에서 혈전을 치른 캐롯은 인삼공사를 상대하기 버거워 보였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시리즈 전적 3-0, KGC인삼공사의 완승을 예상했다.
1차전 분위기는 예상보다 더 일방적이었다. 캐롯은 제대로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43-99로 완패했다. 역대 플레이오프 최다 실점 차 패배, 최소 득점 기록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대로 무너지는 듯했던 캐롯은 2차전 반격에 성공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에이스급 활약을 이어간 이정현의 리드 속에 시리즈 전적을 1-1로 맞췄다.
투혼을 발휘했으나 캐롯은 이어진 두 경기를 내리 내주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박수는 뜨거웠다. 당초 1승도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깼고 3차전에서도 팽팽한 승부를 펼쳤다. 경기 외적으로 무너질 수 있던 상황이었음에도 투지를 불태운 데 대해 찬사가 쏟아졌다. 적장 김상식 KGC인삼공사 감독은 캐롯을 향해 “감동이었다”는 소감을 내놨다.
국내 프로스포츠 리그에서 재정난을 겪는 구단은 이따금 존재했다. 하지만 캐롯처럼 리그 전체를 흔들 정도로 시끄러운 구단은 흔치 않았다. 석연치 않은 인수와 리그 가입 승인 과정 등에 대해 기업과 KBL을 향한 팬들의 비판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투혼을 선보인 선수들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규리그에 플레이오프까지 이어진 선수단의 활약은 새로운 인수자를 찾아야 하는 구단의 미래를 조금이나마 밝게 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