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흔 묻은 가방 수상히 여긴 택시기사 신고로 덜미…살인 관련어 검색하고 범죄 소설 빌리는 등 계획 정황
살해한 뒤 택시를 탄 정유정이 경상남도 양산시 호포역 북쪽 인근에서 하차할 때 여행용 가방(캐리어)에 혈흔이 묻은 것을 본 택시 기사가 수상히 여겨 경찰에 신고하면서 범행이 발각됐다. 체포된 뒤 정유정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살인 관련 단어들을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지역 도서관에서 범죄 관련 소설을 빌려 본 내역 등 범행을 계획했다는 증거들이 나왔다. 이에 정유정은 5월 31일 “살인해 보고 싶어서 그랬다”며 범행을 자백했다.
#과외 앱에서 학부모인 척 접근
부산경찰청과 금정경찰서는 정유정은 과외 앱에 학부모로 가입한 뒤 혼자 사는 과외 선생을 범행 대상으로 물색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정유정은 과외 앱에 과외 강사로 등록된 20대 여성 A 씨에게 연락해 “중학교 3학년 자녀를 가르칠 과외 선생님을 구하고 있다”며 학부모인 척 접근했다.
정유정은 5월 23일부터 2~3일 동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A 씨는 처음엔 과외 제안에 응했지만, 나중에는 이동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지만 정유정은 “시범 과외를 한번 해보고 결정해달라”며 주소를 요구했고 이에 A 씨가 응했다. 범행 당일인 5월 26일 정유정은 오후 4시 자신이 중학생인 척 속이기 위해 온라인을 통해 미리 구입한 중고 교복을 입고 본인 집에서 출발했다.
5월 26일 오후 5시 40분께 A 씨 집에 도착한 정유정은 흉기로 A 씨의 가슴을 여러 차례 찔렀다. 정유정은 오후 7시께 현관문을 바깥에서 당기기만 하면 열리도록 조치한 뒤에 A 씨 집에서 나왔는데 범죄 흔적이 남은 옷은 갈아입은 상태였다. 오후 7시 40분에는 마트에 도착해 사체를 훼손할 수 있는 흉기와 락스, 비닐봉지 등을 구매했다.
#캐리어에 혈흔 묻어…택시 기사 신고로 체포
피해자의 집에서 시신을 훼손한 정유정은 A 씨 집에서 택시 기준 20분 정도 떨어진 자신의 집을 여러 차례 오고 갔는데, 경찰은 이 과정에서 시신 일부를 본인 집으로 옮겼다고 밝혔다. 정유정은 시신 일부를 비닐봉지와 여행용 가방에 넣었으며, A 씨가 실종된 것처럼 꾸미기 위해 A 씨의 지갑과 신분증, 휴대전화 등도 함께 챙겼다.
5월 27일 0시 30분께, 정유정은 A 씨 집에서 나와 택시에 탑승했다. 우선 본인 집에 도착한 뒤 정유정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집으로 가서 여행용 가방을 가져와 택시에 실었다. 그렇게 택시에 시신 일부가 담긴 여행용 가방을 실은 뒤 평소 산책하던 황산문화체육공원으로 향했다. 경상남도 양산시 호포역 북쪽 인근에 하차한 정유정은 여행용 가방에 담겨 있던 시신 일부를 황산문화체육공원 인근 낙동강 변에 유기했다.
정유정이 하차한 뒤 혈흔이 묻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풀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택시 기사는 오전 1시 30분께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접수해 출동한 경찰은 오전 6시께 정유정을 긴급체포했다. 풀숲에서 A 씨의 시신 일부를 발견했으며, A 씨 집에서 나머지 시신 일부를 발견했다.
#범죄 콘텐츠 심취…살인 관련 단어 검색하기도
체포된 뒤 정유정은 줄곧 “피해자와 다투다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석 달 전인 올해 2월부터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포렌식 결과 정유정은 2월부터 최근까지 ‘살인’ ‘시신 없는 살인’ ‘살인 사건’ 등을 검색해왔다. 또한 경찰은 정유정이 지역 도서관에서 범죄 관련 소설을 빌려 본 내역도 파악했다. 평소 방송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범죄수사 프로그램을 많이 봤는데 이 과정에서 살인에 관심을 키워온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증거가 나오고 가족들이 설득하자 정유정은 5월 31일 조사 과정에서 범행 동기에 대해 “살인해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말했다. 이어 “죽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진술했다.
정유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으며, 5년 동안 별다른 직업 없이 사실상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했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고, 생계는 할아버지가 꾸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정유정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유정의 할아버지는 6월 1일 MBC 인터뷰에서 “다음 달 10일, 공무원 필기시험이 있다”며 “독서실, 도서관 이런 데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상상도 안 했던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손녀를 잘못 키운 죄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유족들한테 백배사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웅혁 건국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사회적 연대감이 약할수록 테러에 대해 탐닉하고 테러 지능이 높아지는 성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범죄 관련 콘텐츠 중 일부는 범죄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예능처럼 흥미롭게 묘사하는 경우가 있다”며 “은둔형 외톨이 성향 때문에 범죄 관련 매체에 흥미를 크게 가지고, 이를 통해 학습하면서 범죄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경찰은 6월 2일 오전 9시, 정유정을 살인 및 시신 유기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송치 과정에서 정유정은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며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정유정이 정신질환을 겪은 적이 없는 것으로 파악했으며, 사이코패스 검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검토 중이다.
노영현 기자 nog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