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주주 친화 정책 추진에 전경련 우려 표명…5일 개선 방안 발표
자사주 소각 의무화 이슈는 올해 1월부터 점화됐다. 금융위원회(금융위)가 지난 1월 ‘2023년도 금융위 업무보고’를 통해 ‘자사주 취득·처분 공시 강화 등 제도 개선’을 올해 주요 정책 과제로 보고하면서다. 금융위 정책 자문기구인 금융발전심의회에 따르면 자사주를 매입한 뒤 소각하는 것을 의무화하도록 제안한 상태다. 소각하는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금융위는 오는 5일 자사주 제도 관련 세미나를 열고 개선 방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자사주 매입·소각은 대표적인 주주 친화 정책으로 꼽힌다. 유통 중인 자사주를 기업이 직접 매입하면 단기적으로 주가 하락을 막을 수 있다. 자사주 소각으로 이어지면 전체 주식과 유통 주식이 줄어들어 주당순이익(EPS)과 자기자본이익률(ROE)도 개선될 수 있다. 매입과 소각이 함께 이뤄져야 주주들에게 이로운 셈이다.
기업들은 자사주 매입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매입 목적은 대부분 주주가치 제고다. 강소현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이 작성한 ‘국내 상장기업의 자기주식 처분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20~2022년 5월 유가증권시장의 자기주식 총 취득예정 주식 수는 2억 8000만 주였다. 코스닥 상장기업은 9930만 주의 자기주식 취득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은 자사주 소각보다 처분을 선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유가증권시장의 처분 주식 수는 1억 6000만 주로 집계됐다. 코스닥 시장의 처분 주식 수는 이보다 많은 1억 6900만 주였다. 문제는 자사주 매입 후 소각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자사주는 취득 목적과 달리 처분돼도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 주주가치 제고를 목적으로 자사주를 매입했어도 처분 시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자사주를 활용할 수 있다.
강소현 연구위원은 “회사 경영진이나 지배 주주가 의도적으로 기업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사주를 이용하기도 한다. 자기주식을 우호 세력에 매각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을 유도하거나 인적 분할 시 추가적 지분 취득 없이도 지배주주의 지분을 높이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 경우 지배주주와 소수 주주 간의 이해가 충돌하고 소수 주주의 이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등 해외에서는 기업의 자사주 매입은 대부분 소각으로 연결된다. 반면 국내에서는 소각에 나선 기업이 2.3%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국내 기업 대주주가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자사주를 매입할 것을 우려해 자사주를 취득하는 것을 비판해왔다. 금융위가 자사주 제도를 손보려고 하는 것도 이러한 부작용 발생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금융당국의 자사주 제도 개선 움직임에 경제계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전경련은 지난 5월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2022년 말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자사주가 31조 5000억 원가량이다. 코스피 전체로는 52조 2638억 원으로 추산된다. 기업들이 자사주 정책 변화나 규제 강화 움직임에 대비해 자사주 물량을 대거 주식시장에 풀 경우 소액주주 피해가 막대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일요신문i'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취재한 결과 2013년부터 현재까지 전경련 회장단과 위원장단 기업 13개사 모두 자사주를 취득했던 이력이 있었다. 현재 회장단과 위원장 명단에 있는 그룹은 한화, 코오롱, 롯데, 삼양, 풍산, DB, 종근당, 두산, 한진, GS, 효성, HDC다. 해당 그룹들은 상장 계열사까지 포함하면 모두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가장 많은 자사주를 보유한 기업은 롯데지주로 지난 5월 기준 32.51%다. 이어 두산(16.87%), 삼양홀딩스(12.74%), HDC(11.91%) 순이다. 두산, 풍산, DB, GS, HDC는 상장 계열사도 모두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
자사주 처분 이력은 풍산과 HDC를 제외하고 다 있었다. 자사주를 매입해 대부분 임직원 보상 차원이나 재무구조 개선을 이유로 처분했다. 종근당바이오는 투자재원 확보를 위해 모기업인 종근당홀딩스에 자사주를 처분하기도 했고, 한화는 고려아연과 자사주를 맞교환하기도 했다. 삼양홀딩스와 삼양사는 계열사 간 흡수·합병을 반대한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 행사로 취득한 자사주를 주식 시장에서 처분하기도 했다.
이들 중 10년 동안 주식 소각 이력이 있는 기업은 두산, 한화, 풍산, GS뿐이었다. 상장 계열사 포함 총 62개 기업 중 22개 기업이 자사주를 처분한 적이 있으나 소각 경험은 6개 기업뿐이었다. 두산은 (주)두산과 두산에너빌리티가, 한화는 한화솔루션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자사주를 소각했다. 풍산은 풍산홀딩스가 최근 자사주 절반을 소각했으며, 휴젤은 GS의 피인수 전인 2021년 10만 주를 소각한 바 있다.
이러한 통계로 볼 때 전경련 회장단과 위원장단 기업들이 주주가치 제고 등 공익 목적을 위해 주식을 매입했다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전경련도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에 사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전경련은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면 기업 경영권도 위협받는다. 해외 주요국에 있는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효율적 방어 기제가 국내 기업에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자사주가 우리 기업의 거의 유일한 방어 수단 역할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주 소각이 강제될 경우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이 더욱 빈번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소현 연구위원은 “통계적으로 자기주식 처분 목적은 자기주식 취득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자기주식 처분은 임직원 보상, 운영자금 확보 및 재무구조 개선, 제휴 인수 합병 등에 쓰였다”며 “취득 목적과 무관하게 취득한 자기주식이 활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주환원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김준석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사주는 경제적으로 자산으로 볼 수 없음에도 자산성을 인정하는 법령과 판례가 존재한다”며 “지배주주의 자사주 남용을 억제할 방안을 강구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자기주식의 경제적 실질에 부합하는 일관된 규제체계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