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 로맨스 남주에서 ‘깔끔한 미친놈’으로 백팔십도 변신…“제안받고 처음엔 반신반의”
“박훈정 감독님 인터뷰를 보니 ‘(배우 교체를) 고민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대안이 없었다’는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제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냥 쿨하게 ‘너 할 수 있어?’ 하셔서 ‘네, 하고 싶어요. 해야죠’라고 답했죠. 제 입장에선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 때문에 이미 촬영이 미뤄졌고, ‘네가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받는 상황에서 배우로서의 책임감이나 사람으로서의 도리로라도 ‘할 수 있다’고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제 말에 ‘그럼 하자’하고 결정해주셨던 건데, 사실 감독님과 제작사 대표님 두 분이서 고민을 정말 많이 하셨단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어요. 그런 모습을 제겐 보여주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박훈정 감독의 신작 ‘귀공자’에서 김선호는 필리핀과 한국의 혼혈로 필리핀 불법 경기장을 전전하는 소년 복싱선수 마르코(강태주 분)를 뒤쫓는 정체불명의 킬러 귀공자를 연기했다. 그의 이름이 곧 타이틀인 만큼 이 작품 안에서 귀공자란 캐릭터는 스토리 그 자체로 여겨질 정도로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명품 슈트를 빼입고 고급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킬러라기엔 너무 눈에 띄는 모습을 한 귀공자는 ‘일’을 하는 중에도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을 비춰내 잔인성을 더욱 배가시킨다. 이런 모순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성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큰 호평을 받았다.
“귀공자란 캐릭터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마르코를) 대체 왜 따라 다녀?’였죠(웃음). 아니 쪽지라도 써서 ‘내가 너 도와주는 거야’ 하면 안 되나? 이런 식의 원초적인 질문을 감독님께 하게 되더라고요. 같이 산책하면서 제가 많이 여쭤봤는데 질문을 하면 1초 만에 답해주세요. 감독님은 귀공자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아이처럼 웃으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부분을 참고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애초에 대본에도 약간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거든요. 콜라를 되게 맛있게 마시고, 자꾸 웃어요(웃음). 순수하면서도 잔인한 그런 모습을 잘 묘사하려고 노력했죠.”
처음에는 “이런 캐릭터가 왜 나한테 왔나”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이제까지 김선호가 보여줬던 ‘말랑말랑’하고 ‘다정다감’한 캐릭터들과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이었으니 도대체 자신 안의 어떤 지점에서부터 귀공자를 상상할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박훈정 감독이 처음부터 계획한 귀공자의 캐릭터성이 ‘깔끔한 미친놈’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대중들이 아는 김선호에게서 어떻게 이런 캐릭터가 나왔는지 그 캐릭터적 선구안(?)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감독님께서 저를 만나서 ‘귀공자’ 대본을 주고 싶다 하셨어요. 저도 감독님의 팬이었기 때문에 ‘정말 너무 같이 하고 싶습니다’하고 말씀드렸고요. 대본을 받아 읽었을 땐 너무 재미있었는데, 딱 하나 납득 안 됐던 게 ‘나한테 이런 역할이?’라는 거였어요(웃음). 물론 배우로선 당연히 연기 욕심이 나지만 이미 드라마 같은 매체로 제가 너무 많이 노출이 된 상태에서 갑자기 누아르 장르를 하면 대중들에게 거부감이 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도 조금씩,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과 함께 위트를 보여드리면 ‘저 배우 저런 것도 할 수 있네’하고 봐 주시는 기회가 더 열리지 않을까 싶어서 ‘귀공자’를 하기로 결정했던 거죠.”
정통 액션을 연기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촬영할 때마다 정신이 없었다는 귀띔도 이어졌다. 워낙 액션 신에 색이 뚜렷한 박훈정 감독의 완벽한 촬영을 위한 고집을 맞춰내야 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더 어린 신인 배우의 고군분투 앞에서 힘들단 소리를 차마 꺼낼 수 없어 더 열심히 뛰어야 하는 그만의 고충이 있었다는 게 김선호의 이야기다.
“뛰는 신이 정말 많았기 때문에 연기가 쉽지 않았는데 저 말고도 강태주 배우가 이미 몇 개월째 그렇게 뛰고 있어서 힘들다고 할 수 없었어요. 거기다 대고 ‘아, 나 어지러운데’ 하고 쉬어버리면 그 친구의 원망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웃음)? 한번은 진짜 너무 힘들어서 잠깐 앉아서 쉬는데 태주가 와서 제게 영양제를 한 병 주더라고요. 그걸 쪼그려 앉아서 둘이 같이 마셨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쉬다가 또 촬영 들어가면 엄청 뛰었는데 귀공자 바지가 워낙 꽉 끼다 보니 뛰면서 한 장 찢어 먹고 그랬죠(웃음).”
이렇게 현장에서 정신이 없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비단 이번 작품의 모든 지점이 김선호의 ‘첫 도전’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기회를 준 박훈정 감독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는 일념이 자신을 더욱 채찍질했다는 것. 완성된 영화를 보고 첫 주연작이라는 뿌듯함이나 흥행 성적의 기대보다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 먼저 기억에 남았던 것도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약간의 후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촬영할 때 정말 매 신에 굉장히 이입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어요. 열정이 넘쳐 났던 것 같아요. 그런데 반대로 또 그런 후회도 남죠. ‘내가 완급 조절을 제대로 잘 했을까’ 하는…. 감독님은 충분히 잘했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 신을 수행하는 것 자체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제가 그때 어떻게 연기했었는지 자세하게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현장에 내가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그런 게 너무 커서, (다른 배우들처럼) 현장에서 그 상황을 즐기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기도 했죠.”
그런 아쉬움을 뒤로 넘겨둔다면 ‘귀공자’는 확실히 김선호의 배우 인생 속 확연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호불호를 떠나 김선호가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둔 만큼 앞으로 그가 종횡무진할 영역도 넓어졌다. ‘귀공자’로 새로운 얼굴을 한 꺼풀 덮어씌운 김선호는 어딘가에서 또 한 번, 운 좋게 다시 불릴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배우를 꿈꾸기 전부터 영화를 정말 많이 봤더라고요. 어느 순간 ‘나도 언젠가 영화를 해볼 수 있겠지’하는 상상도 해봤어요. 언젠가 실력이 되면 영화계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영화 대본이 들어왔을 때 정말 기뻤죠. 사실 영화는 오디션을 볼 기회도 정말 없었거든요. 이제 내가 거기서 써주실 만큼 실력이 늘었나 보다, 누군가가 날 보고 계셨나 보다 하면서 설렜던 것 같아요. 이번 ‘귀공자’ 이후에도 저를 보시면서 ‘이 친구가 드라마도, 영화도 둘 다 할 수 있단 말이지? 정말 좋네’라고 생각하셨으면 좋겠다는, 그런 부푼 꿈을 가지고 있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