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따른 손실 ‘이례적’ 인정…정부, 국민연금 상대로 구상권 행사 나설지 주목
지난해 5월 18일 엘리엇이 국재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출한 청구인 심리 후 답변서를 보면 청구금액은 투자손해액 4억 825만 달러, 지연이자 2억 663만 달러 등 모두 6억 1409만 달러다. 중재 절차 비용은 별도로 지출한 만큼 달라고 청구했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0일 사건 중재판정부가 우리 정부에 5358만 6931달러(약 690억 원·달러당 1288원 기준)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고 밝혔다. 중재판정부는 여기에 2015년 7월 16일부터 판정일까지 5% 연복리의 이자를 지급할 것을 명했다. 아울러 엘리엇이 정부에 법률비용 345만 7479달러(약 44억 5000만 원)를, 정부가 엘리엇에 법률비용 2890만 3188달러(약 372억 5000만 원)를 각각 지급하도록 했다. PCA가 엘리엇 청구금액의 7%만 인정했다고 알려졌지만 정확히는 투자손해액 청구액의 14%다.
엘리엇은 2014년 6800억 원을 들여 삼성물산 주식을 샀다. 합병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이 주식 가치가 1조 3000억 원으로 올랐을 것으로 가정해 투자손해액을 산정했다. 중재 재판에서 주가 상승을 가정한 손해배상을 결정한 사례는 거의 없다. 애초부터 이 같은 액수가 모두 인정받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한국 정부는 애초 손해배상 불가 입장을 펼쳤다. 그런데 한국 법원이 청와대의 부당한 영향력으로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라는 판결을 내리며 입장이 곤란해졌다. 이후 우리 정부는 손해 값 계산을 굳이 한다면 서울고등법원이 합병을 배제한 삼성물산 가치를 2014년 12월 18일 가격인 주당 6만 6602원로 인정한 판단을 적용할 수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우리 법원이 인정한 값에 엘리엇이 주식을 팔았다면 약 7400억 원이 된다. 투자액과의 차이가 600억 원 남짓으로 이번 중재 판결 배상액에 근접한다.
그런데 이 역시 엘리엇이 중재 초반에 제시한 투자 손실(배상액과 다름) 492억 원보다 많다. 이후 이를 1039억 원으로 높이지만 엘리엇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500억 원 이상만 받아도 밑지지 않는 장사였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은 액수를 챙기게 됐다.
특히 재판부는 지연이자는 대출이자율로, 배상기준통화는 원화로 하자는 우리 측 주장도 기각했다. 판결문은 연 복리 5%의 높은 이자율과 함께 달러화 기준으로 배상을 결정했다. 지난 8년간 시장금리 평균은 연 5% 미만이다. 지연이자액이 투자손해액의 절반이 넘는다. 법률 비용도 우리가 지급할 액수(372억 5000만 원)가 받을 액수(44억 5000만 원)보다 8배 이상 많다.
엘리엇 측은 판결 이후 “대한민국이 이번 중재판정 결과에 승복하고, 중재판정부의 배상 명령을 이행하기를 바란다”며 “중재 판정에 불복하면 추가적인 소송 비용 및 이자를 발생시켜 한국 국민의 부담만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상당한 만족감과 자신감을 표현한 셈이다. 단 배상액이 늘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애초 목표한 바를 거의 다 달성했다는 태도다.
우리 정부가 이번 판결을 받아들여도 문제는 남는다. 1300억 원 이상의 혈세가 지출되는 데에 따른 책임 규명과 후속 조치의 필요하기 때문이다. 메이슨캐피탈의 중재 소송도 조만간 판결이 나온다. 엘리엇과 같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혈세 지출이 1300억 원보다 훨씬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금액이 커질수록 그냥 넘기기 어려워진다.
정부는 이번 재판에서 국민연금은 국가기관이 아니며, 이에 따라 국민연금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투자자-국가분쟁 해결절차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법령이나 정책에 따라 피해를 봤을 때 국제 중재로 손해배상을 받도록 한 제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도입됐다. 중재는 국제기준에 따라 이뤄져 국내법과는 다를 수 있다.
국내법으로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정부는 이번 중재 결정에 따른 배상금에 대해 국민연금에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국가기관이 아니라면 엘리엇이 아닌 일반 주주들도 당시 합병으로 인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요구는 법률로 정한 게 없으면 불가능하지만, 일반 법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국민연금이 일반 법인이라면 부당한 영향력을 따르다 연금에 피해를 입힌 당시 경영진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도 물을 필요가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이 향후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에 '보약'이 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손해배상 부담으로 국민연금 의결권을 부당하게 활용하려는 시도가 근절될 가능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합병 등에서 비율을 정할 때도 좀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