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 좋다’는 말에 신탁부동산 계약 전세금 떼여…친구에게 무턱대고 개인정보 넘겼다가 ‘빚더미’
#전문용어 동원해 교란
6월 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9단독 채희인 판사는 사기와 위조사문서행사 및 공인중개사법 등의 위반혐의로 기소된 이 아무개 씨와 송 아무개 씨, 박 아무개 씨 등 3명에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징역 8년 6개월, 징역 3년 6개월씩을 선고했다. 2030 청년이 대부분인 수십 명을 상대로 벌인 부동산 전세사기의 주동자와 가담자들이다.
이들의 범행은 2018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관악구의 공인중개사 박 씨가 전셋집을 구하는 세입자들에게 '싸고 좋은 집'이라며 한 빌라를 소개했다. 고객들이 마음에 들어 하면 곧바로 집주인 이 씨를 불러냈다. 이 씨는 고객들에게 '신탁을 아는지' 확인한 뒤 "나는 명의상 주인이고 실제 주인이 따로 있다"고 설명했다.
'신탁'의 개념을 모르는 청년들에게 일당은 갖은 전문용어를 동원하며 교란 작전을 폈다. 고객이 약간의 의심 눈초리만 내비치면 "실제 주인은 송 씨인데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공정증서를 작성해줄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공정증서는 공증사무소 직원이 특정 사실에 관한 법률적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만드는 문서다.
세입자들은 실제 주인인 송 씨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계약을 했다. 그리고 재계약 시점인 2년이 지나서야 피해 사실을 확인했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다. 명의상 주인인 이 씨와 공인중개사 박 씨에게 줄줄이 찾아가 항의했으나, "돈은 실제 주인 송 씨에게 넘어갔으니 직접 찾아가 항의하라"는 배짱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이에 대해 채 판사는 "일당은 사회 경험이 적은 피해자들에게 전세권이나 임대차보호법상의 권리가 아닌, 채권적 권리에 불과한 약속어음 공정증서로 보증금이 반환된다는 취지로 기망행위를 했다"며 "피해자들이 부동산신탁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을 이용해 대항력을 무력화한 채 재산상 손해를 입혔다"고 지적했다.
한눈에 봐도 생소한 계약 형태로 전문지식 없이는 이해가 어려운 내용들이다. 신탁부동산이란 말 그대로 남에게 명의를 맡기고 실제 주인의 이름을 숨겼다는 뜻이다. 여러 사정에 따라 활용되는 제도지만 일반적으로는 채권자 등 제3자의 강제집행 절차 등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흔하다. 전문가들은 웬만해선 신탁부동산 계약을 만류한다.
법무법인 도시와사람의 이승태 변호사는 "신탁부동산과 관련한 전세사기 피해를 예방하려면 신탁회사와 위탁자 및 수탁자 등에 대한 정보와 각각의 동의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 등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며 "기본적으로 실제 집주인과 등기부등본의 소유자가 다르면 전세계약은 피하고 보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지인이 더 무섭다
20대 초반 등 피해자의 나이가 어릴수록 범행은 더욱 악랄하고 무자비하게 이뤄지는 경향이 짙다.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7월 5일로 예정된 재판이 한 예다. 지인에게 신분증을 잠깐 빌려줬다가 1억 원 넘는 빚을 떠안게 된 24세 청년의 사건이다. 친한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피해자는 정신적 충격마저 토로하고 있다.
사건은 2022년 7월 불거졌다. 피해자 L 씨는 친구에게서 전화로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L 씨는 정중히 거절했는데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런저런 돈 얘기에 부모와의 불화 등의 대화를 나누다 L 씨가 자신 명의로도 대출이 나오는지 궁금하다며 친구에게 신분증을 주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것.
'친해서 믿을 수 있는 친구'한테 신분증이 넘어간 순간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친구는 L 씨의 신분증을 이용해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은행에서 1억 원의 전세대출을 신청한 뒤 다른 이들과 돈을 나눠 갖기도 했다. L 씨는 도중에 여러 차례 신분증 반환을 요구했으나 계속 거부당하다 어느 순간에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한 달여 지나 가까스로 친구와 연락이 닿은 L 씨는 더 큰 충격에 빠졌다. 이 같은 기망행위에 가담한 사람이 친구 외에도 여럿이었다. 자신의 신분증을 활용해 공인중개사와 주택 임대인 등이 여러 형태로 수천만 원을 거래한 사실까지 확인했다. 당장 수사를 의뢰하고 재판까지 넘어갔지만 L 씨에겐 소송전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L 씨 사례와 같이 신분증을 잘못 맡기고, 관악구 전세사기 사건처럼 부정확한 정보에 넘어가는 일이 한 번에 겹쳐지면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대전지법 공주지원에서 진행 중인 K 씨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그는 '갚지 않아도 되는 대출이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속아 신분증을 넘겼다가 부채는 물론 감금에 성폭행까지 당했다.
K 씨는 21살이던 2020년 중학교 동창생으로부터 오랜 만에 전화를 받았다. 반갑게 통화를 이어가다 '2년 대출 제한만 받으면 돈은 안 갚아도 되는 대출이 있다'는 꾐에 넘어갔다. 대출이란 개념 자체가 생소한 나이에 "에이전시가 은행코드를 알아내 환수를 터트리면 대출 기록이 사라져서 가능하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속고 말았다.
이후 K 씨가 동창생을 만나러 간 자리에는 낯선 무리들이 함께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문신이 가득한 남성 무리는 K 씨의 신분증 등을 가져간 뒤 지역 저축은행에서 1000만 원의 대출을 받았다. 이 밖에 휴대폰 개통과 차량 대여 및 과태료 납부 등으로 막대한 돈을 써 K 씨에 부담을 전가했다.
K 씨는 위압감에 저항도 못해보고 모텔과 PC방 등으로 일주일 넘게 끌려 다녔다. 어느 하루는 모텔에서 성폭력까지 당했고 이때도 공포감에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K 씨는 간신히 도망쳐 나와 경찰에 신고했지만 일당이 검거되기까지는 2년이 넘게 걸렸다. 이제 막 재판이 시작됐으나 K 씨는 2년여를 지옥에서 살아야 했다.
#'개인' 아닌 '사회' 문제
경찰청은 6월 8일 '전세사기 전국 특별단속 중간결과'를 발표하며 전세·대출 사기 총 986건을 적발하고 2895명을 검거해 288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돈을 편취한 인원이 1471명으로 가장 많았다. 피해자 연령별로는 20대가 563명(18.8%), 30대가 1065명(35.6%)으로 절반 이상인 54.4%를 차지했다.
청년들의 부족한 사회 경험을 악용한 현상이라지만 이를 개인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사기 행위는 금전 손실에 더해 한 사람의 삶을 앗아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만큼 중대한 폭행으로 간주해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제도적 차원의 예방책을 강구해야 할 필요성이 나오는 이유다.
서민수 경찰인재개발원 교수는 "사기에도 일종의 '슈퍼전파자'가 있다. 적발 가능성이 없다거나, 믿어도 될 만한 정보라는 식의 오해가 주변에 퍼지며 공범들이 모이고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며 "인적 네트워크를 특히 중요시하는 청년들이 지인에게 의심의 문턱을 낮추고 허위 정보를 따르다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서 교수는 이어 "유럽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사기 범죄도 폭력으로 규정하고 대단히 중대한 범죄로 간주하는 추세"라며 "돈만 잃는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와 자신의 삶마저 빼앗기게 돼 사회적 손실이 무척 크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핵심은 사기를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바라본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국회에 계류된 '사기방지 기본법'에 주목하기도 한다. 지난 8월 경찰 출신인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으로, 경찰에서도 몇 차례 공청회를 진행하며 관심을 모으는 제도다. '사기정보 분석원' 신설 등 사기범죄 대응체계 고도화와 사기범죄 대상 위장수사·신상공개 등을 추진하는 게 뼈대다.
김용판 의원실 관계자는 "사기 범죄는 경제 손실에 더해 정신 피해까지 입히는 범죄로 이제는 금융·통신 기술을 활용해 조직화하고 있어 갈수록 피해 규모도 확대될 수 있다"며 "이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려면 사기사건 창구를 단일화하고, 사기정보의 통합·전문적 분석을 통해 차단부터 피해회복까지 종합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