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묵인했던 관행까지 속속 들춰내…‘검찰 출신 수장’ 금감원도 압박 수위 높여
그동안 금융권 사건들은 주로 금융당국의 행정제재 선에서 마무리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금융당국이 사건을 넘기지 않는데 검찰이 먼저 나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최근 공정위와 검찰이 주도적으로 나서면서 개인이나 회사의 자격을 제한하는 행정제재 수준을 넘어선 거액의 과징금과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됐다. 게다가 단속을 주도하는 이들은 모두 금융권 정보에 밝은 법조인들이다. 이들이 그동안 금융당국이 묵인했던 관행까지 속속 들춰내 위법 여부를 따질 경우 파장이 상당할 수 있다(관련기사 잇따른 공정위 전속고발권 ‘패싱’…기업 사정도 검찰이 주도하나).
정부 단속기구들이 금융권을 정조준한 것은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지대 추구 행위를 억제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이후다. 지대 추구(Rent Seeking)는 경제 주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현상, 즉 로비·약탈·방어 등 경제력 낭비 현상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특정 경제 주체가 면허 취득 등을 통해 독과점적 지위를 얻게 되면 별다른 노력 없이 차액 지대와 같은 초과 소득을 얻을 수 있다. 경제 주체들이 이 같은 지대를 얻기 위해 정부를 상대로 경쟁을 벌이는 행위가 지대 추구 행위다. 국내 금융회사는 대부분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야 하지만 신규 인가가 철저히 통제돼 일단 진입하면 경쟁이 적다. 대신 금융당국은 금융회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퇴임 금융관료들이 금융권에 새로 둥지를 트는 경우도 많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이 같은 금융권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한기정 위원장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후 재경부와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위원을 3차례나 역임했다. 금감원 분쟁조정위원과 보험연구원장, 신용회복위원으로도 활동했다. 2020년에는 금융위 산하 금융산업경쟁력 평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20년 말부터는 대법관 후보추천위원, 검찰총장후보 추천위원, 법무부 감찰위원장으로 사법계에서 영향력을 키우며 현 정부 초대 공정위원장에까지 오르게 됐다. 기업 관련 경력이 대부분이었던 전임자들과 다르다.
공정거래법에서 금융회사를 단속할 근거 중 가장 유력한 것이 공정거래법 40조 부당공동행위 제한이다. 사업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른 사업자와 공동으로 부당하게 경쟁을 제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다. 대표적인 것이 가격 결정·유지 또는 변경이다. 금융권에서는 은행연합회와 금융투자협회, 보험협회 등에서 업체들이 모여 영업과 관련된 주요한 사안들을 논의한다. 비금융협회들은 과거 담합 논란을 겪으면서 현재는 그 기능이 약화됐다.
금융권은 그동안 금융위 산하로 취급돼 공정위의 영역 밖에 있었다. 하지만 한기정 위원장이 취임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면서 사실상 금융위 방어막이 사라졌다.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모습이다. 그동안 금융당국은 이자 장사 비판에도 금리를 내리라는 압력만 행사했을 뿐 은행들의 원가구조를 들여다보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공정위는 지난 4월부터 주저없이 시중은행의 금리담합 여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과거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입증에 실패했지만 은행 금리 산정 기준이 코픽스(COFIX)로 바뀌면서 다시 해볼 만한 상황이 됐다는 평가다.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고 여론의 지지도 높은 편이다.
6월 들어서는 증권사에도 공정위가 들이닥쳤다. 감독·조사관이 2~3명씩 팀을 이뤄 임시 사무실까지 마련할 정도로 꼼꼼히 살피고 있다. 공정위가 조사대상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는 신용융자 수수료(이자율)와 대형 은행, 증권사들의 국고채 입찰 현황을 살핀 것으로 추정한다. 신용융자는 반대매매 기능 덕분에 떼일 위험은 적은데 수수료율은 높다는 지적이 많았다. 증권사별 신용등급에 따른 자금조달 비용이 크게 다르지만 이자율 격차는 은행 간 대출 이자율 차이 수준이다. 경쟁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공정위는 은밀한 조정이 이뤄졌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영장은 없지만 조사에 협조 받는 형식으로 관련자의 스마트폰까지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고채 입찰은 국고채전문딜러(Primary Dealer)인 대형 금융회사들이 입찰 가격과 물량을 사전에 협의했다는 의혹이다. 이로 인해 기획재정부가 상대적으로 더 높은 금리에 국고채를 발행하게 됐다는 혐의다. 공정거래법 40조 1항 8목에서는 ‘입찰 또는 경매를 할 때 낙찰자, 경락자, 입찰가격, 낙찰가격 또는 경락가격,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을 결정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공정위 조사 이후 채권시장에서는 담합 의혹을 받을 그 어떤 대화도 하지 말라는 일종의 함구령까지 내려졌다.
공정거래법 40조 위반에 대한 과징금은 최대 매출액 20%다. 금융은 거래금액 단위가 크다. 은행 대출 시장은 수천조 원에 달하고 신용융자도 수십조 원 규모다. 국고채 입찰 시장은 매월 조 단위로 거래된다. 거래액이 아닌 거래로 얻는 영업수익만 매출액으로 인정해도 20%면 엄청난 규모가 된다. 형사처벌로 최대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
금감원의 압박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회계사 자격을 가진 검사 출신 이복현 원장이 잇따른 시세조종 등 불공정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하면서다. 계속되는 주가조작과 시세조종 의혹으로 이복현 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소문도 들린다. 금감원은 차액결제거래(CFD)를 이용한 시세조종 의혹인 ‘라덕연 게이트’에 이어, 남양유업 인수를 앞두고 내부정보를 이용해 주식투자를 한 혐의로 사모펀드(PEF) 한앤컴퍼니 관계자들을 검찰로 신속히 넘겼다. 시세조종은 징역형이 가능한 형사 범죄다.
결국 가장 바빠진 것은 결국 금융 관련 위법사항에 대한 기소를 전담하게 될 검찰이다. 검찰에서 증권 관련 범죄는 여의도를 관할하는 서울남부지검에서 주로 다룬다. 남부지검은 문재인 정부에서 폐지됐던 금융∙증권 합동수사본부를 부활하고 단장으로 단성한 부장검사를 임명했다. 단성한 합수부장는 이복현 금감원장과 사법연수원 동기로 경제 및 금융범죄 수사에 풍부한 경험을 가졌다고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도 함께 일한 경력도 있다. 이 원장이 금감원 조사로 위법 사항을 적발하면 단 합수부장이 이를 맡아 기소하는 형식이다. 최근 드러난 증권사 연구원의 선행매매 사건도 금감원 특사경이 적발해 남부지검에 기소의견으로 넘긴 사건이다.
증권가에서는 이복현 원장이 내년 총선에 출마하면 남부지검장인 양석조 검사장이 후임으로 낙점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양석조 검사장은 한동훈 법무장관과 동갑이지만 사법연수원은 29기로 2기수 아래다. 역시 검사 시절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수사를 했던 경험이 있고 신임이 두터운 후배라는 것이 정설이다. 금융위원회 파견 근무 경력도 있어 금융 관련 사건에 밝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그동안 금융권에는 드물던 형사 사건이 잇따르면서 법조계에서는 금융회사들이 새로운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대부분 대기업이어서 대법원 최종심까지 오랜 기간 거액의 법률 관련 비용을 지출할 여력이 충분하다. 금융 관련 사건은 판례가 적은 만큼 기소될 경우 적극적인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최근 공정위나 금융위 출신 전관들의 몸값도 오르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