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모임 ‘나다움’ 발족…학폭 공소시효 폐지 등 주장, 피해자 지원센터 설립 추진
#"학폭 범죄 명문화하고 처벌 규정 분명히 해야"
표 씨 등은 학폭 피해 생존자 모임 '나다움'을 만들고 전국의 피해자들과 힘을 합쳤다. 학폭 관련법을 바꾸고 예방 및 피해지원 기관을 설립하는 데에 앞장설 계획이다. 특히 학폭 피해자들이 언제든 연대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든다고 한다. 7월 11일 기준 18명의 피해자들이 모였으며 인원은 꾸준히 늘고 있다.
나다움 활동가들은 한목소리로 '학교폭력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다. '학폭 범죄'를 명문화함으로써 형법 및 그에 상응하는 처벌 규정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게 그 뼈대다. 또 학폭의 공소시효를 아예 없애거나, 피해자가 성인이 된 날부터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폭 미투의 걸림돌로 작용해온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등의 폐지도 요구한다.
이들은 ‘나도 표예림이다’라며 전국에서 모였다. 학폭 피해 사실을 폭로했다가 명예훼손에 따른 내용증명을 받는 등 2차 가해를 당한 표 씨의 사례가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가해자에 직접 사과를 요구하거나, 법적 문제를 제기하는 자체가 어렵다고 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강주훈 씨(27)는 "여러 제 피해 사례의 공론화를 시도하고, 가해자에 민형사상 책임도 물으려 했으나 잘 안 됐다"며 "언론 등을 통한 학폭 미투는 유명인이 아닌 이상 힘들 수밖에 없고, 가해자와 법적 다툼을 벌이더라도 오래된 사건이라 증거수집이 어려워 피해자가 오히려 상당한 부담을 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고교 시절 혼자 구석에서 노래를 중얼거렸는데 침을 튀었다는 이유로, 혹은 뒷담화를 했다는 등 거짓된 빌미로 학폭을 가한 무리들이 있었다"면서 "그들은 현재 사업 등을 하며 잘 지내지만, 저는 끔찍한 학창시절을 마치고도 여전히 고통에 시달리며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다"고 토로했다.
학폭 피해자로서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20대의 한상협 씨(가명)는 미흡한 법 때문에 무력감마저 느낀다고 털어놓았다. 한 씨는 "학창 시절 사소한 질병으로 놀림을 받다가 소위 '빵셔틀'이 되어 삶이 망가져 버렸다"면서 "심지어 입시를 준비할 때도 가해자들과 거리가 먼 대학을 골랐을 정도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가해자에 사과를 요구하거나 법적 책임을 물으려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사실적시든 허위사실이든 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를 당할 수 있는 구조에서 피해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저와 같은 제자가 없길 바라 교단에 섰지만 현실적인 구제책이 없어 대단히 난처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한 씨는 "당연히 학폭의 예방이 가장 중요하지만 발생했을 경우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형성돼야 문제를 풀 수 있다"며 "그런 믿음이 없는 탓에 학교 현장에서도 교사들이 문제를 외면하거나, 기계적 중립으로 상황을 면피하려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연대만으로도 서로에게 힘 더해"
여러 시민의 응원과 격려를 받은 표 씨지만 법의 장벽은 넘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가해자들의 신상이 대외에 공개됐지만, 그들의 근황 등을 파악하기조차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표 씨는 “가해자들을 굳이 찾을 계획도 없으나 괜히 나섰다가는 '스토킹처벌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표 씨는 현재 모처럼 웃음을 되찾은 목소리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성 없는 태도로 해선 안될 시도까지 했던 표 씨지만, 이제는 같은 피해자들과 손을 맞잡게 돼 커다란 위안이 됐다고 한다. 앞으로는 다음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
표 씨는 "피해자 입장에선 가해자에 직접 사과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런 환경에서 피해자들이 학폭의 예방 및 처벌 등 구조적인 문제를 고치는 데에 직접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무엇보다 연대감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을 더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박한울 씨(29)도 나다움 운영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다. 오히려 먼저 표 씨에 찾아가 연대를 제안한 당사자다. 그는 올 4월부터 "프로야구 A 선수한테 학폭을 당했으며 이를 수습해야 할 담임교사한테는 '바지를 내리고 피해를 입증해 보라'는 식의 2차 가해를 당했다"고 폭로한 이후 꾸준히 학폭 미투 운동에 동참해 왔다.
박 씨는 "학폭 관련 대책은 2011년 대구 중학생 피해자 자살 사건 등 꼭 큰 사고가 난 뒤에야 마련되는 현상이 이어져 왔다"며 "최근까지도 학폭은 꾸준히 사회 문제로 지적돼 왔으므로, 이제는 '학폭 특별법' 등으로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치유기관 겨우 한 곳…전국에 만들어야"
나다움은 학폭 특별법뿐 아니라 '아동범죄 처벌 특별법'처럼 학폭의 검찰 송치 의무화도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에 따라 아동범죄는 반드시 검찰에 송치하도록 돼 있다. 경찰이 혐의 유무에 관한 의견은 달지만, 피해자는 증거 등을 보완해 검찰 단계에서 거듭 엄벌을 촉구할 수 있다.
학폭 피해자를 치유할 수 있는 기관의 설립도 과제다. 지금은 대전의 '해맑음학교'만 존재한다. 이마저도 시설 노후화로 안전문제가 불거져 잠시 문을 닫은 상태다. 교육부는 6월 29일 '새로운 학폭피해 국가기관의 문을 열겠다'고 밝혔다. 나다움은 "성폭력상담소처럼 학폭 기관도 지역마다 둬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해맑음학교 입장에서도 반기는 일이다. 조정실 해맑음학교 교장은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전국 1만 개가 넘는 학교에서 학폭은 꾸준히 발생 가능한 문제인데, 피해자와 가족들을 보듬을 수 있는 시설이 워낙 제한적인 것은 사실"이라며 "해맑음학교는 기숙 생활을 해야 하는데, 피해자들의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도 개선은 국회 등의 몫이다. 나다움은 피해자를 지원할 자체 시스템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전국 학폭 피해자들이 본인의 피해를 이야기할 수 있고, 법률·의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 계획이다. 이 공간에서 학폭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목표 인원은 10만 명이다.
박한울 씨가 나다움의 간사이자 온라인 커뮤니티 제작을 맡았다. 그는 "자기 피해를 꺼내지 못해 힘들어 하거나, 말을 해도 2차 가해 등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사회의 편견을 깨고 용기 있는 피해자들이 모여 입법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 중인 만큼, 힘을 합친다면 세상도 꼭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