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도 대책도 부실, 파행 속 일부 국가 철수…전·현 정부 관계자 두루 관여, 정치권 공방도
기록적인 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전국민 휴대폰엔 쉴 새 없이 ‘폭염 경보’를 알리는 재난문자 알람이 울리는 상황이다. 그 가운데 전북 부안군 새만금에선 전세계 청소년들이 야영을 하면서 문화를 교류하는,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열리고 있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간척지에서 숨 막히는 더위와 함께 ‘역대급 생존 게임’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잼버리를 두고 졸속 운영 비판이 거세다.
8월 4일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영국 스카우트 멤버들이 새만금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8월 5일엔 미국, 싱가포르, 벨기에 스카우트 멤버들이 철수 행렬에 동참했다. 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 안전을 고려한 조치인 것으로 전해진다.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환자가 속출할 뿐 아니라 대회 참가자들이 집단으로 코로나19에 감염되는 악재가 잇따랐다. 새만금 잼버리가 ‘오징어게임’ 실사판이 되는 것 아니냐는 뼈 있는 지적까지 나왔다. 폭염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조직위원회 언론 통제 논란, 행사장 내 매점 바가지 논란, 부실 식사제공 논란 등이 잼버리를 수놓았다.
세계스카우트잼버리는 세계스카우트연맹이 주최해 4년마다 열리는 세계 스카우트 멤버 합동 야영 대회다. 야영뿐 아니라 지구촌 청소년들이 한데 모여 각국 문화를 교류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2023년 8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전북 부안군 새만금 관광레저용지 제1지구에서 제25회 잼버리가 열렸다. 전 세계적으로 스카우트 멤버 4만 3000여 명이 새만금으로 모였다. 대회 슬로건은 ‘Draw Your Dream(너의 꿈을 펼쳐라)’이다.
한국이 제25회 세계잼버리 유치전에 나선 건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이었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잼버리 유치 국내 후보지로 강원도 고성과 전북 새만금 중 새만금을 최종 후보지로 낙점했다. 김완주 전 전북도지사는 2012년 “세계 잼버리에 필요한 350만 평 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인 새만금에서 잼버리가 개최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2016년 8월 4일 한국잼버리 개영식에서 “새만금은 우리 국민 개척정신과 미래지향적 창조 의지를 잘 보여준다”면서 “새만금은 지구촌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희망,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정신을 키워주는 데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새만금 잼버리 유치에 대한 각국 성원을 부탁한 메시지였다.
세계 잼버리 유치를 위해 정부 지원이 시작되기 전 악재가 터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탄핵 정국 이후 취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은 새만금 잼버리 유치 기조를 이어갔다. 직접 사안을 챙기며 범정부 차원 대회 유치 노력을 이어갔다.
2017년 8월 16일 세계스카우트총회에서 새만금은 제25회 잼버리 개최지로 결정됐다. 유치가 결정된 시점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었다. 대회 유치 추진은 박근혜 정부, 대회 유치 성공은 문재인 정부가 이뤄낸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대회를 주최하는 입장에 선 건 윤석열 정부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3월 29일 한국스카우트연맹 명예총재직으로 추대됐다.
윤 대통령은 “어린 시절 보이스카우트 활동은 엄청나게 큰 즐거움이었다”면서 “돌이켜보면 보이스카우트로 활동했던 것이 제가 성인으로 커가면서 사회 활동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 대통령은 새만금 세계잼버리와 관련해 “대통령으로서 전폭 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대회가 유치된 후 새만금에 대한 보완 사항이 꾸준히 언급됐다. 2022년 국정감사에선 이원택 민주당 의원이 잼버리 개최 주무부처 장관인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을 향해 폭염 대비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2023년 5월 어린이날 주말에 내린 폭우 이후엔 새만금 배수 시설이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2023년 7월 장마로 인한 폭우 이후 새만금 잼버리 개최지 내 배수 문제는 더욱 부각됐다.
8월 1일 새만금 잼버리는 성황리에 시작됐다. 윤석열 대통령 내외가 직접 행사에 참여해 스카우트 복장을 입고 참가자들을 독려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새만금 잼버리 행사장 상황은 훨씬 열악했다. 물이 빠지지 않은 축축한 땅에 플라스틱 판자를 얹은 채 야영지를 구축해야 했다. 야영지를 구축한 뒤엔 밤낮으로 이어지는 폭염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외국 소셜미디어 상에선 새만금 잼버리 행사장을 ‘난민촌’에 비유하는 비판글이 잇따르기도 했다.
폭염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영국스카우트연맹이 가장 먼저 철수 결정을 내렸고, 다른 국가들도 철수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계스카우트연맹이 성명을 통해 “한국스카우트연맹에 예정보다 일찍 행사를 종료하고 참가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원하는 대안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세계스카우트연맹은 “주최 측이 행사를 이어가기로 결정했고, 폭염 문제를 해결하려 추가적인 자원을 동원하는 등 모든 것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8월 5일 여름휴가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 산업과 문화, 역사와 자연을 볼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을 긴급 추가하라”고 지시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 서면 브리핑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서울, 평창, 경주, 부산 등 시·도 지자체에 협조를 요청해 이 같은 관광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모든 스카우트 학생에게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여기다 정부 총력 대응을 강조하며 스카우트 학생들에게 시원한 냉방버스를 함께 제공해 추억에 남는 한국 잼버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당부가 있었다.
같은 날 한덕수 국무총리는 전북 부안군 새만금 잼버리 프레스센터 브리핑에 직접 나서 “각국 대표단이 회의를 한 결과 대회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면서 “정부는 폭염을 고려해 새만금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권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총리는 “그런 분들에 대해선 교통을 포함해 필요한 지원을 충분히 제공할 방침”이라고 했다.
전북 지역경제에 10조 원가량 경제효과를 기대했던 새만금 잼버리가 위기 대응만 하다 끝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약 1083억 원가량 사업비가 투입된 대회인 만큼 향후 정치권에서 새만금 잼버리 파행 논란을 둘러싼 책임공방도 뜨거워질 전망이다.
8월 5일 민주당은 새만금 잼버리가 조기 중단 위기에 처한 상황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가 손대는 일마다 최악의 상황에 빠진다”고 직격했다.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은 “꿈과 희망 속에서 펼쳐져야 할 잼버리 대회가 악몽과 사고로 점철될 동안 윤석열 정부는 뭘 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대회 시작부터 폭염 대책 미비가 지적됐는데, 온열질환자 수가 수천 명에 달하고, 배수 등 준비 부실도 끊이질 않았다. 정부 당국과 주최 측은 안일한 대응으로 일관해 사태 수습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도 역공에 나섰다.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와 전라북도 외화내빈식 부실 준비로 위기에 처한 새만금 잼버리,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가 바로잡고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 강민국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새만금 잼버리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수석비서관급 회의에서 직접 챙길 만큼 적극적 관심을 보인 행사였다”면서 “취임 첫해 새만금 잼버리를 유치했으며, 이듬해엔 잼버리 지원 특별법까지 통과시켰다”고 강조했다.
강 대변인은 “6년 동안 투입된 예산 1000억 원이 적절히 사용됐는지도 의심되는 실정”이라면서 “문재인 정부와 전라북도 전·현직 지사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라고 반문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지금 새만금 잼버리 조직위와 집행위는 여야가 다투기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부 장관 등 윤석열 정부 국무위원 3명이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동시에 전북 전주갑 지역구 김윤덕 의원 또한 조직위원장이다. 집행위원장은 민주당 재선 의원 출신 김관영 전북도지사다. 여야 모두 상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해볼 만한 공방’이라고 생각할 거다. 이미 대회 자체가 국제적 망신을 다수 양산해냈는데, 이를 두고 여야가 또 지루한 공방을 펼친다면 이야기가 끝도 없을 것이다.”
야권에선 주무부처인 여가부 장관뿐 아니라, 탄핵 소추 국면을 거쳐 복귀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을 비롯해 윤석열 정부 전체적 시스템을 향한 공세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여권은 그간 새만금 잼버리 준비에 투입된 사업비 집행 과정 등 지난 정부에 초점을 맞춰 야당의 공격에 응수할 것으로 보인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