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적 병원비’ 쌓여가는데 지원 규모·날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제도 개선 시급” 울분
일요신문은 서현역 사건 피해자인 20대 여성 A 씨의 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들은 다른 피해자 및 가족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기도 하다.
#청천벽력
"늦게 나온 여식이라 사랑을 많이 줬어요. 이 녀석이 밝고 욕심도 많은 아이거든요. 그렇다고 어디 나돌아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어쩌다 이렇게 돼 버렸는지 아직도 믿지를 못하겠는 거죠…."
외동딸인 A 씨는 집, 학교, 아르바이트만 주로 오가는 성실한 대학생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 학과에 입학했고, 미술과 연기 등 예술 계통에 소질이 있는데 글쓰기도 잘해 언젠가 책도 내는 게 꿈이다. 다만 아직 병원에 누워있는 까닭에 이 같은 꿈들을 실현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현실에 놓였다.
최원종이 흉기난동을 부린 8월 3일 오후 6시쯤 A 씨의 부모는 여느 때처럼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현역에서 잔혹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속보로 나왔지만 '설마 우리 딸이…'라는 걱정까지는 안 했다. 그 시각은 A 씨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때였다.
식사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원에서 걸려온 통화였다. A 씨가 잠깐 커피를 사러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딸을 찾아 나서는 게 어떻겠냐는 음성이 이어졌다. 이때도 '설마 우리 딸이…' 싶었지만 부모는 만일의 사태를 걱정해 발길을 옮겼다.
서현역에 다다르자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역력했다. 수십 수백 명의 경찰들이 포진했고, 구급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현장. 멀찍이 분당구청 앞 광장에는 닥터헬기까지 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설마 우리 딸이…'라는 마음뿐이었다. 눈앞 닥터헬기에 딸이 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걸려온 전화. 분당경찰서였다. 경찰관은 첫 마디를 간신히 뗐다. "어머님,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침착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딸이 수원 아주대병원 응급센터로 옮겨졌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칼부림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그렇게 곧장 아주대병원으로 향했다. 며칠 머무르며 경찰과 의료진 등의 설명을 들어보니 칼부림 피해는 일단 아니었다. 최원종이 돌진한 차량에 치인 딸은 뇌사 상태로 수술이 쉽지 않다고 했다. 사고 지점이 사각지대라 CC(폐쇄회로)TV를 확인하기 어려웠고, 앞으로의 의료 절차는 어떻게 될지 알기 힘든 상태다.
#'천문학적' 병원비, '최저임금 미만' 지원비
부모로서는 딸의 상태 다음으로 의료비가 가장 큰 고통이다. 병원에 머무른 지 6일 만에 1300만 원이 청구됐다. 일요신문과 만난 8월 16일, 입원한 지 보름도 안 지난 이날 날아온 '중간' 청구 비용은 2295만 5715원으로 부쩍 뛰었다. 병원에서 때우는 끼니와 주차비 등 부대비용까지 합치면 계산조차 힘들 정도다.
당장은 가능한 부분에 한해 의료보험으로 비용을 막고 있다. 가해자 차량의 보험사로부터는 '검토 후 연락주겠다'는 메시지를 받아 기다리는 중이다. 수원지방검찰청 범죄피해자 보호센터에서 이날 입금된 생활지원비는 고작 100만 원.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금액이다. 이 또한 앞으로 3개월만 지급 가능한 구조다.
병원에서 계속 딸을 지켜야 하는 A 씨 부모는 일도 손에서 뗀 상태다. 원래는 잘 커준 딸을 믿고, 부모도 꿈을 이루고자 만만찮은 돈을 들여 개인사업에 도전하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빚만 쌓이게 됐다. 이에 경기도와 성남시 등 지자체한테 보조생활비 등을 지원받으려 했는데 후진적인 행정 절차에 실망감만 더해졌다.
범죄 피해자가 지자체에서 적정한 지원을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거나 아예 불가능이다. 무엇보다 경기도와 성남시 가운데 한 곳만 선택해야 하는 규정이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신청 절차도 복잡하고 제출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인 데다, 문의사항이라도 생기면 담당자를 찾아 종일 휴대전화를 붙잡고 통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어느 쪽 지원이 나은지를 직접 하나하나 다 따져본다. 이를 거쳐 신청을 마쳐도, 심사 결과에 따라 지원을 받게 될지 여부가 불확실하다. A 씨 가족은 일단 경기도에서는 지원이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건이 재난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판단된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또 다른 지원이 있지 않을지 다시 찾아보고 있다.
병원에 누워 있는 가족을 온전히 돌보며 이를 병행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수십 장의 제출 서류들을 출력하고 각 기관에 직접 방문하거나, 혹은 있지도 않은 팩스로 전송해야 하는 등 몹시 번거로운 구조에 A 씨 가족을 돕는 병원 직원들마저 답답함에 울화통을 터트린다.
딸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만큼 병원비도 어디까지 치솟을지 알기 힘든 상황. 이런 사연이 최근 공론화하며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직접 입원비 지원 등을 지시했다. 그래도 A 씨 부모는 여전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과연 어느 규모로 언제까지 지원이 이뤄질지 현재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장관 약속 이후 A 씨 가족은 검찰로부터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지원하겠다'는 원론적인 대답만 들었다. 딸이 깨어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식의 확답은 아직이다. 그저 이제 막 대화를 시작했으므로 정부와 검찰 등의 진정성에만 기댈 뿐이다. 물론 이 역시 딸을 곁에 둔 채 절차를 준비하기란 만만치 않다.
검찰 지원을 받으려는 A 씨 부모는 △중상해구조금 신청서 △의료비 환수·대위 확인서 △진단서·소견서 등 피해 상태 증명할 문서 △경찰 사건사고 사실 확인원 등 범죄피해 확인 서류 △입원기간 등을 증명할 서류 △가족관계증명서와 등본 등 △통장사본 △신분증 사본 △소득증명 서류 △국세 납세증명서 등 갖가지 구비서류에서 숨 막히는 헤엄을 치고 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지원금…더 많은 피해자들
A 씨 부모는 "장관께서 지원을 지시한 점은 다행이지만, 현실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져야 한다"며 "저희를 비롯한 다른 피해자들한테도 현실적인 지원이 이뤄지는 선례를 마련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시민이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중범죄에 노출돼야 재난으로 인정될 수 있겠나"라고 호소했다.
이번 사례는 정부가 운용하는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A 씨 가족이 정부 등에 지원을 요청하는 데에는 제도적 바탕이 있다. 이 기금을 운용하는 검찰, 여성가족부, 경찰은 기관별로 배분된 예산 한도 내에서 범죄 피해자에 치료비 등 각종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여기서 검찰의 경우 범죄피해자 지원센터를 통해 5년에 5000만 원만 지원이 가능하다. 한 해 1500만 원 수준이다. A 씨 가족에게 보름도 안 돼 청구된 약 2300만 원과 비교하면 허무한 액수다. 특히 A 씨는 상대 측 보험사한테 약 1500만 원 보상금을 지급받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 검찰 지원금과 중복수령이 안 된다.
이렇다 보니 검찰과 경찰 안팎에선 A 씨 가족 외에도, 제도의 수혜를 입지 못한 채 알려지지 않은 범죄 피해자들이 상당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례로 서현역 사건 희생자인 고 이희남 씨의 가족들도 아직 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전해졌다.
재원 자체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크다. 2023년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은 전체 1133억 4700만 원이다. 여기서 기금운용비 등을 뺀 주요 사업비는 826억 7300만 원이다. 이 돈을 검찰, 여가부, 경찰이 나눠 쓰는 것이다. 올해 기관별 기금은 검찰 413억 6300만 원, 여가부 375억 3700만 원, 경찰 37억 7300만 원이다.
언뜻 액수가 커보여도 실제로는 아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법무부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3개 기관의 사업비 총액에서 치료비 등 피해자에 바로 주어지는 '직접지원비'는 283억 6900만 원으로 불과 34.3% 수준이다. 그 외에 543억 400만 원(65.7%)은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등 시설운영에 드는 '간접지원비'다.
직접지원비 항목만 따로 뜯어봐도 문제가 심하다. 일단 이 기금은 통상적으로 검찰이 400억 원대, 여가부가 300억 원대, 경찰이 30억 원대를 유지해왔다. 2022년 기준 사업별 현황을 들여다보면, 검찰청의 긴급생계·치료비는 전년보다 9억 4000만 원 적은 40억 원만 배정됐다. 구조금도 같은 기간 약 10억 원 낮아진 105억 원 수준이었다.
또 눈에 띄는 지점은 경찰한테 배분된 몫이다. 부처 폐지 가능성이 있는 여가부의 약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둘러싼 적정성 논란은 오래 전부터 제기됐다. 경찰이 범죄 사건의 초동수사를 맡는 만큼, 선제적인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경찰의 기금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랐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외면당했다.
이런 현실에서 A 씨 가족은 병원 인근 경찰서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쪽잠을 청하고 있다. 역시 경찰의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으로 운영하는 숙소인데, 서현역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고도 숙소 지원은 경찰에서 하고 있는 셈이다. 이마저 오는 8월 26일에는 짐을 빼야 해 상황이 녹록지 않다.
A 씨 부모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경찰이 여러 방면으로 도와줬고 지금도 병원에 상주하고 계신다"며 "병원비와 생활비 지원 등의 문제로 골치 아픈 와중에 경찰관들이 되레 '죄송하다'고 말해주더라"고 전했다. 이어 "대체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막막한 찰나에 어째서 일선 경찰관들이 미안해하느냐"며 "몹시 씁쓸하다"고 털어놓았다.
#"To. 다른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A 씨 가족은 일요신문과 인터뷰에서 딸의 모습은 물론 이름도 공개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나선 이유는 정부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도개선을 통해 본인들과 같은 상황에 누구도 놓이지 않기를 바라서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서현역 사건의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한 지원이 따라주길 바랐다.
여러 행정절차 간소화와 피해자 중복지원 필요성을 여실히 체감했다고 한다. 범죄피해자 보호기금의 재원·지원 확대와 운용효율성 제고도 당연히 요구했다. 또 서현역 사건은 경찰청장이 '테러행위'로 규정했음에도, 현실 속 A 씨의 피해는 교통사고 정도로 인정된다. 중범죄 피해지원에 관한 매뉴얼 전반을 재정비해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전문가들의 진단도 똑같다. 정의롬 부산외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죄 피해자 보호 재원 확대는 필수이고, 정부 부처와 지자체 등의 유기적인 연계도 중요하다"면서 "현행 법무부 장관 소속의 범죄피해자보호위원회를 국무총리 직속으로 옮겨 기금의 관리 및 운용 심의를 강화하는 방법도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A 씨 부모는 '중요한 얘기'가 더 있다며 말을 보탰다. "며칠 전 사건의 희생자인 고 이희남 선생님의 남편 등 가족 분들을 뵀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저희가 있는 아주대 권역외상센터까지 직접 찾아오셨어요. 누구보다 힘드실 텐데 저희에게 따뜻한 말씀과 함께 위로금을 건네셨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어 사건의 다른 피해자들을 만나기를 몹시 희망한다고 했다. "사건 당일 고 이희남 선생님의 응급처치를 도운 10대 청소년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께도 직접 뵙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또 다른 피해자 분들, 뵙고 싶습니다. 저희가 소재와 연락처를 알아봤으나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서로 연대해 위로가 되어주길 기다립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