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검 구속 후 ‘박정희 생가’행 명예회복 시동? ‘친박’ 결집과 수도권 민심 악화 우려 ‘경계심’
#박근혜, 크게 움직였다
2022년 3월 24일 대구 달성군 사저에 입주한 뒤 공개 일정을 자제해왔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주목도가 큰 외부행사를 만들었다. 날짜가 대한민국 최대 국경일인 광복절에 맞춰졌고, 내년 총선을 불과 8개월 앞둔 시점이어서 정치판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보는 형국이다.
박 전 대통령은 8월 15일 경북 구미시를 찾아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많은 인파가 몰려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을 보거나 말을 건네려고 애쓰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박 전 대통령은 생가 입구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말복이 지났는데 아직 덥네요”라는 말까지 건네며 일일이 악수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광복절에 부친 생가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 직접 설명했다. 그는 “오늘이 어머니(육영수 여사) 49주기 기일이기도 하고 아버지 생가를 방문한 지도 좀 오래됐다”며 “사실은 좀 더 일찍 방문하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조금 늦어졌다”고 말했다. 대구에 사는데 바로 인근 구미에 있는 부친 생가를 찾는 것은 당연한 도리라는 취지로 정치적 의도를 배제하려는 의도로 읽혔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별로 없다는 게 정치권의 한목소리다. 박 전 대통령이 움직인 시점은 박영수 전 국정농단의혹사건 특검이 비리 혐의로 8월 3일 구속된 직후다. “단 한 푼의 돈도 받은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온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십억 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된 박영수 전 특검에 도덕적 우위를 확보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정치권 해석이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6월말에도 대구 중구 남산동에 자리한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청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때는 언론에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날 교구청을 찾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 전 대통령을 알아보고 악수를 건넬 정도로 외부에 쉽게 알려질 수 있었는데도, 박 전 대통령은 기자들이 오는 것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두 달도 안 돼 큰 외부행사를 잡은 걸로 보면 박 전 대통령의 판단 변화가 읽힌다.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취임식 때 흔히 국방색으로 불리는 카키색 옷을 입었는데, 15일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 때도 카키색 계열의 의상을 착용했다. 구미 방문에 대해 비장한 각오를 드러내는 행보라는 해석이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직후 청와대를 급히 떠나는 과정에서 발을 다쳤는데, 이로 인해 상당 기간 정상적 보행이 불편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회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미 방문에서도 활기찬 발걸음을 보였고 스스로 신발을 신고 신발 끈까지 묶을 정도로 건강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을 드러냈다.
은퇴한 친박계 전직 의원은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정치 재개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박 전 대통령도 건강이 회복되면서 자존감도 다시 찾았고 생각의 범위가 다시 넓어지고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에 대한 의지도 솟아나게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변 전언에 따르면 전자공학과 출신인 박 전 대통령은 최근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과학기술 변화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고, 이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대화를 할 때면 농담도 곧잘 섞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장면도 만들 만큼 정신적 여유도 찾았다고 한다. 탄핵과 수감 생활의 충격을 극복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친박'도 따라 움직일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움직이자 다음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친박계 인사들의 재부상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도가 없다면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굳이 이런 주목도가 높은 행보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친박 재부상론’을 주장하는 정치권 인사들의 분석이다.
박 전 대통령을 접해본 이들은 그가 돌다리를 열 번 두드리고 건너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8월 15일 구미에 간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는 해석의 연장선이다. 한마디 말조차 여러 번 생각하고 꺼내는 성향인데 공개행사에 나섰다는 것은 숙고의 산물이며, 그가 다음에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MB(이명박)계 인사들에 비해 친박 그룹이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점도 그의 행보에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분석이 제기된다(관련기사 ‘이’ 쪽으로 힘 기울자…친이-친박 오랜 악연 소환된 까닭).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일단 이를 부인했다. 구미 방문에서 친박계 전 의원들의 TK(대구·경북) 총선 출마설과 관련해 기자들이 묻자 박 전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가 있었다. 그때 나온 내용이 다다”라며 일단 말을 아꼈다. 앞서 최측근 유영하 변호사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친박은 없다’ ‘정치하고 싶으면 본인들이 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는데, 그게 맞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이 말은 박 전 대통령이 여당의 주류 세력과 공천을 두고 세력 대결을 벌이는 구도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정치를 오랫동안 해왔고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당내 비주류 수장으로서 비주류의 설움을 몸으로 겪어본 박 전 대통령인 만큼 비현실적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부친상을 당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8월 16일 전화를 걸어 조의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통화에서 “윤 대통령의 순방 외교를 잘 지켜보고 있다. 뿌듯하고 자부심을 느낀다”는 말까지 했다.
‘친박’으로 분류됐던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도 박 전 대통령이 친박을 결집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 대표는 8월 16일 MBC라디오 ‘신장식의 뉴스 하이킥’ 인터뷰에서 “(박 전 대통령이) 유영하 변호사를 통해서 ‘친박 없다’ 선언해 버렸다”며 “내가 최경환 전 부총리, 서청원 대표를 만나보고 우병우 수석 주변 얘기를 다 종합해보니 ‘대통령이 직접 정치 전면에 나서지 않기에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어 “내가 만난 친박 전직 의원이든 전직 장관이든 단 한 사람도 박근혜 전 대통령에 기대 뭘 하겠다는 사람이 없더라”며 “이는 박 전 대통령이 안 움직인다는 말로 정치와 관련된 사람은 아무도 안 만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친박계의 느슨한 결집을 지원하는 역할까지 버리겠다는 뜻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방문에서도 강한 애착을 보였듯 대한민국 경제 기적을 일궈낸 부친의 업적을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미래 세대에게도 계승시켜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를 제대로 해낼 정치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게 박 전 대통령의 인식이다.
친박 인사들은 박 전 대통령이 메시지 정치에 나설 것으로 관측한다.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를 찾고, 거기에 알맞은 말을 전파하면서 주목도를 높이고 느슨한 형태지만 정치 세력을 주변으로 결집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에 동조하는 총선 후보군이 나타나고 공천 경쟁에도 뛰어들 전망이다. 최경환 전 부총리, 유영하 변호사,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선두로 친박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공천 고지를 향해 몸을 풀 것으로 보인다.
#여권 주류세력의 고민
여권 내부에선 박 전 대통령 움직임이 친박 후보의 부상과 연결되는 것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친박 후보들이 많아지고 공천에서 탈락할 경우 무소속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커져, 분열지수 상승에 대한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권 주류 세력은 ‘친박’이라는 과거 정치 세력의 재등장은 수도권 민심을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국민의힘은 박 전 대통령 공개행보에 대해 의미를 축소하고 진화에 나섰다. 윤희석 국민의힘 대변인은 8월 16일 BBS라디오 ‘전영신의 아침저널’ 인터뷰에서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라기보다는 일상 가족사와 관련된 그런 행보”라며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박 전 대통령 본인은 전혀 현실 정치에 다시 개입하고자 하는 의사가 없는 걸로 판단한다”고 했다.
여권 지도부는 박 전 대통령의 동향에 안테나를 높이 세우며 다각도로 의도를 분석 중이다. 일단 박 전 대통령의 친박 지원설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일축하고 있다.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생각이 있다면 문재인 전 대통령처럼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을 통해 메시지를 발신해야 하는데, 그런 장면이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는 게 여권 주류의 말이다.
윤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박 전 대통령과 직접 소통하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질 여러 정치적 혼란 요소를 직접 제거해나갈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들도 적잖다. ‘보수 총집결’ 기치로 내걸고 전·현직 대통령이 화합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되면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내세운 친박 정치는 어려워지고 정치 재개를 원하는 친박 인사들은 모두 흩어져 개인기로 돌파할 수밖에 없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