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직원 혼자 있을 때 노려 3900만원 강탈…나흘 만에 용의자 특정, 그 하루 전 베트남 출국
8월 18일, 22년 전 대전 국민은행 권총 강도살인 사건 피고인 이승만(53)과 이정학(52)의 2심 선고 공판이 열렸다. 이들은 2001년 12월 21일 오전 10시쯤 대전 서구 둔산동 소재의 국민은행 지하 주차장에서 현금수송용 가방을 내리는 은행 출납 과장 김 아무개 씨를 권총으로 살해한 뒤 현금 3억 원을 들고 달아났다.
21년 동안 장기 미제였던 이 사건은 범행에 사용된 차량 내부에 있던 마스크와 손수건 등 유류물에서 검출된 유전자(DNA) 정보를 통해 본격적인 수사가 재개됐다. 2017년 충북 소재 불법게임장에서 발견된 DNA와 같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경찰은 당시 불법게임장에 드나든 이들을 일일이 조사해 용의자를 특정했다. 그렇게 2022년 8월 25일 이정학이 검거됐고, 이정학의 진술을 통해 공범 이승만도 검거됐다.
1심에서 이승만은 무기징역, 이정학은 징역 20년이 선고됐지만 이날 대전고법 형사1부(송석봉 부장판사)는 원심을 파기하고 이승만과 이정학에게 모두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21년 동안 발전한 경찰의 DNA 검출 기술을 바탕으로 형사들이 끈기 있게 '장기미제'를 해결한 쾌거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대전에서 또 다른 은행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8월 18일 정오 무렵 대전 서구 관저동 소재의 신협 지점에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소화기를 뿌리며 진입한 A 씨가 여자 직원을 흉기로 위협해 현금 3900만여 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사건이 발생한 신협 지점에는 당시 휴가 인원을 제외한 4명의 직원이 근무 중이었는데, 사건 발생 시간이 점심시간인 정오 무렵이라 직원 2명만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남자 직원 한 명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건이 발생했다. 그렇게 여자 직원 한 명만 있던 신협 지점에 진입한 A 씨는 순식간에 범행에 성공한다.
A 씨는 범행 전날인 17일 대전 유성구와 서구에서 오토바이 2대를 훔쳤다. 오토바이를 훔치는 모습이 CC(폐쇄회로)TV 등에 포착될 것을 우려한 A 씨는 승용차 등 다양한 이동 수단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고 이 과정에서 복장도 수시로 바꿨다. 소위 말하는 ‘뺑뺑이 수법’이다.
범행을 위해 신협 지점에 접근할 당시에도 훔친 오토바이 2대를 번갈아 타며 동선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은행강도 범행을 벌인 뒤 A 씨는 서대전나들목을 지나 충남 금산군 추부면까지 이동했다. 1~2시간 사이 A 씨는 관저동에서 출발해 유성구 진잠동, 방동, 충남 논산시 벌곡면, 금산군 진산면 등을 거쳐 도주했다. 결국 금산군 추부면에서 오토바이를 버린 뒤 A 씨는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해 대전으로 들어왔다.
경찰은 A 씨가 훔친 오토바이 1대는 대전 도심, 다른 1대는 금산에서 각각 19일과 20일에 발견했지만 A 씨가 헬멧과 장갑을 낀 탓에 감식을 통해서 지문 등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도주 과정에서 A 씨는 국도로 여러 곳을 오가며 동선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훔친 오토바이 한 대를 예상 도주로에 미리 배치해 두고 CCTV 사각지대 등을 도주로에 포함시키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중간에 옷을 갈아입었으며 모자와 마스크 등으로 최대한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 경찰 수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완벽한 범행 준비 때문이었는지 A 씨는 오토바이로 도주하는 과정에 한 차례 주유까지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경찰은 거듭된 CCTV 영상 분석 과정에서 A 씨가 8월 17일 대전 서구에서 오토바이를 훔치는 과정을 포착했다. 경찰은 A 씨가 당시 승용차를 사용했음을 알아내 차량 소유주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용의자의 신상을 특정했다.
해당 차량의 차주는 카센터 업주인데 그는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A 씨가 8월 4일 업무상 차가 필요하다며 빌려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차량을 8월 17일 오토바이 절도 과정에서 활용한 A 씨는 8월 20일 카센터에 방문해 직접 차량을 반납했다. 그리곤 공항으로 이동했다.
8월 21일에서야 A 씨의 신상을 특정한 경찰은 A 씨가 이미 하루 전인 20일 베트남 다낭으로 출국한 사실을 알게 된다. 경찰은 국제형사기구인 인터폴에 공조 요청을 해 검거에 나섰지만 이미 A 씨가 동남아시아로 출국한 터라 국제 공조 수사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A 씨의 범행 동기로 수년 전부터 진 막대한 도박 빚을 보고 있다. A 씨 지인들에 대한 조사에서 경찰은 A 씨가 수년 전부터 동남아시아 등지를 오가며 도박에 빠져 수억 원의 빚을 진 것으로 파악했다. 이로 인해 평소 가족과도 불화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정한 직업이 없던 A 씨에게는 다수의 범죄 전력이 확인됐는데 미성년자 시절 강도 범행 전과도 드러났다.
8월 18일 은행강도 사건이 벌어진 뒤 경찰은 대전 지역 6개 전체 경찰서 형사팀을 비상소집해 250여 명을 수사에 투입했지만 용의자 특정에 나흘이 걸렸다. 반면 A 씨는 사흘 만에 해외로 출국하면서 경찰은 검거에 실패하고 말았다. A 씨의 출국으로 검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릴 수도 있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현재까지 공범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지만 은행 내부 공모 여부도 염두에 두고 넓은 의미에서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점심시간이라 은행에 직원이 단 둘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남자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은행강도 행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경찰은 A 씨가 남자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확인한 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