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천하’ 두 달 만에 용병그룹 바그너 수뇌부 증발…푸틴 “유능했지만 실수도” 사망 애도, 미국 ‘암살’ 판단
러시아 관영매체 타스통신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전용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전용기는 오후 6시경 트베리주 쿠젠키노 들판에 추락했다. 러시아 민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인 프리고진과 공동창업자 드미트리 우트킨 등 전용기 탑승자 10명이 전원 사망했다.
프리고진은 6월 무장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 ‘푸틴의 투견’이라 불리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프리고진과 우트킨이 함께 설립한 바그너그룹은 러시아군과 같은 군복을 착용하고, 조직도도 유사해 사실상 러시아군 하청업체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바그너그룹은 러시아가 국제정치적 여건상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전쟁에 참여하면서 ‘외교 사각지대’를 책임져 왔다.
2022년 2월 막이 오른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서도 바그너그룹은 최전선에서 러시아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내부적으로 갈등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바그너그룹과 러시아 군 수뇌부 간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2023년 6월 마침내 갈등이 폭발했고 그 결과물이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은 단 하루 만에 러시아 남부 주요 군사거점인 로스토프나도누(로스토프)를 점령했다. 프리고진은 쿠데타를 ‘정의를 위한 행진’이라 명명했다. 로스토프를 출발한 반군은 순식간에 모스크바 200마일 근방까지 진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의 투견’의 칼날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향한 셈이었다. 순식간에 러시아 심장부를 둘러싼 긴장감이 고조됐다(관련기사 ‘1일천하’로 만족? ‘푸틴의 투견’ 프리고진 러시아 쿠데타 막전막후).
푸틴 대통령은 즉각 기자회견을 통해 분노감을 표출했다. 푸틴 대통령은 6월 24일 긴급기자회견을 통해 “우리 등에 칼이 꽂히는 상황에 직면했다”면서 “반역에 직면한 우리의 대응은 가혹할 것”이라고 했다. 모스크바엔 계엄령이 선포됐다. 푸틴과 프리고진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치킨게임이 될 것으로 보였다. 일촉즉발 상황은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프리고진이 갑작스레 한 수를 무르며 진격 중단을 선언했다. 그 이면엔 중재자가 있었다.
알렉산드로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다. 벨라루스에서 29년 동안 장기집권 중인 인물이다. 국제사회에서 루카셴코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로 알려져 있다. 여기다 프리고진과는 20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겐 ‘쿠데타 종결’ 카드를, 프리고진에겐 생존 방안을 내밀었다.
쿠데타는 하루 만에 극적 타결됐다. 푸틴 대통령은 쿠데타를 ‘없던 일’로 하는 데 동의했고, 프리고진은 중재자 루카셴코 대통령이 있는 벨라루스에서 신변을 보장받기로 했다. 프리고진은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인 피를 흘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알기 때문에 계획에 따라 부대를 되돌려 야전캠프로 되돌아간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쿠데타가 일단락됐지만, 프리고진이 앞으로 꾸준히 암살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랐다. 쿠데타 종료 이후 3일 동안 잠행을 펼친 프리고진을 두고 암살설이 돌기도 했다. 6월 28일 루카셴코 대통령은 “프리고진은 벨라루스에 있다”면서 반군 수장의 생존신고를 했다. 7월 4일엔 프리고진이 직접 소셜미디어(SNS) 상으로 육성 메시지를 공개하며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렸다.
7월 6일엔 프리고진이 러시아로 컴백했다는 사실이 루카셴코 대통령을 통해 알려졌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프리고진이 자신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프리고진이 벨라루스 망명 대신 러시아 컴백을 선택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무장반란 자체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7월 20일엔 프리고진이 영상을 통해 당분간 우크라이나 전챙 참여 계획이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이후 잊히는 듯했던 프리고진은 다시 핫이슈 중심으로 떠올랐다. 8월 23일 그가 탑승한 전용기가 추락한 까닭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프리고진이 죽지 않았다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프리고진이 탑승한 비행기가 어떻게 추락했나를 두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꾸준히 암살 가능성이 제기됐던 가운데 실제로 프리고진이 죽음을 맞이하자 국제사회에선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월 23일 “내가 프리고진이라면 무엇을 탈지 조심할 것이라 말한 게 기억 나느냐”면서 “러시아에서 푸틴이 배후에 있지 않은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놀랍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프리고진 죽음 배후에 푸틴 대통령이 있다는 의혹에 무게를 싣는 발언이었다.
항공추적 전문 웹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 24’에 따르면 프리고진이 탑승했던 전용기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중 운항 고도 8.5km(약 2만 8000피트)에서 약 30초 만에 2.4km(약 8000피트) 이상 추락했다. 친 바그너그룹 성향 텔레그램 채널 ‘그레이 존’은 “러시아군 방공망에 의해 비행기(프리고진 전용기)가 격추됐다”고 주장했다.
미국 국방부 패트릭 라이더 대변인은 프리고진 전용기 격추설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라이더 대변인은 “미사일이 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믿을 만한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다만 프리고진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미국 국방부는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라이더 대변인은 프리고진 사망 배후와 관련된 질문에 “비행기에서 사망한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푸틴 대통령이 군 사령부에 비행기 격추 명령을 내린 것이 거의 확실하다”면서 “러시아 당국이 바그너그룹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 프리고진과 동료들을 제거하려 움직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미국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정부 당국자 발언을 인용해 “프리고진 전용기 추락은 암살 계획에 따른 결과”라면서 “각종 정보를 취합한 평가에 따르면 지대공 미사일이 비행기를 격추시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비행기 내부에 설치된 폭탄 등 다른 원인에 따라 비행기가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프리고진의 생존 가능성을 언급하는 목소리도 있다. 프리고진이 종종 대역을 쓰기도 했고, 신분증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점을 근거로 이번에 추락한 항공기에 탑승하지 않았을 것이란 내용이다. 2019년 프리고진 이름이 승객 명단에 존재했던 군용기가 추락했지만, 그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던 사례도 ‘프리고진 생존설’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복수 군사 전문가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프리고진 생존설과 관련해 ‘음모론적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러시아 항공교통국은 프리고진 사망을 기정사실화했다. 러시아 항공교통국은 “프리고진은 추락한 항공기에 탑승한 10명 중 한 명”이라고 발표했다.
‘암살 배후설’에 휩싸인 푸틴 대통령도 입을 열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점령지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수반 대행 데니스 푸실린과 회의에서 프리고진 사망을 언급했다. 푸틴 대통령은 “1990년대부터 그를 알았다”면서 “그는 굉장히 유명한 사업가였지만 힘든 운명을 타고났고 실수도 했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그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세운 큰 공을 잊지 않을 것”이라면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선 그(프리고진)는 불과 어제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전직 군 정보기관에서 활동했던 한 군사 전문가는 “이번 비행기 추락으로 프리고진뿐 아니라 러시아가 가장 애용하는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뇌부가 전부 사망했다”면서 “쿠데타 이후 미운털이 박힌 지 두 달 만에 바그너그룹 수뇌부가 전부 증발한 셈”이라고 했다.
이 전문가는 “일부 독재국가에서 벌어지는 숙청작업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띠는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면서 “프리고진이 비행기 사고로 돌연 사망한 것은 사실상 쿠데타 이후 ‘바그너그룹 힘빼기 작업’ 최종장인 것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프리고진의 이런 죽음은 어느 정도 예정됐던 수순이었다”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화해를 하는 것도 드문 케이스지만, 뒤끝이 없을 가능성은 더 드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