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 ‘윰블리’ 공포물 도전장 “배우 말고 다른 직업 상상 안 돼…좋은 에너지로 주어진 시간 잘 보내고파”
“수진의 광기 연기를 보고 ‘정유미의 새로운 얼굴이다’라고 평해주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긴 했지만 저로선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땐 광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게 아닌데 광기에 대한 평들이 많이 나오니까 ‘좀 더 그렇게(광기 어리게) 표현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새로운 얼굴이란 말도 그래요. 사실 그런 얼굴을 제가 볼 일도 없고, 보여줄 일도 없잖아요, 현실에선(웃음).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딱히 특별한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영화 ‘잠’은 봉준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옥자’ 연출부 출신 유재선 감독이 선보이는 첫 장편영화다. 제76회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시체스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 메인 경쟁 섹션에 초청돼 해외에서 먼저 주목한 이 작품을 두고 봉준호 감독은 “최근 10년 사이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고 평한 바 있다. 바로 이 시사평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부터 ‘기생충’까지 평단과 대중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으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 봉 감독의 호평인 만큼 ‘잠’의 초반 흥행 기세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도 분석된다. 이런 예측에 대해서 정유미는 “(그런 기대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며 조금 씁쓸해했다.
“반반이란 생각이 들어요. 아예 (봉준호 감독의) 이야기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아무래도 봉 감독님의 평에 대한 기대치도 있고, 그로 인한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저도 봉 감독님 이야기를 일부러 안 꺼내고 그랬는데 이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더라고요(웃음). 감독님의 평으로 더 큰 기대를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혹시나 관객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한편으론 그 평처럼 ‘나도 이 영화 잘 봤다, 재미있더라’라는 평가도 오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반반인 거죠.”
그런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으로 합을 맞춘 적이 있던 이선균과의 신혼부부 케미스트리는 어땠을까. 정유미는 자신을 “시나리오와 디렉션 자체에만 충실한 배우”라고 소개한 반면, 이선균에 대해서는 “시나리오의 빈 칸을 끊임없이 스스로 메워가는 배우”라며 혀를 내둘렀다. “괜히 배우를 오래 하는 게 아니”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현장에서 저희는 특별히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았어요. 그저 믿고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이)선균 오빠는 시나리오에서는 항상 (연기보다) 좀 더 평면적인 캐릭터가 그려져 있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서 그걸 메워나가는 거예요. 그걸 보며 정말 대단하기도 하고, ‘난 왜 저렇게 못 하지’ ‘괜히 (배우를) 오래 하는 게 아니구나, 괜히 인생 캐릭터를 매번 만들어나가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오빠가 저를 한때 ‘연기 천재’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네요(웃음).”
‘연기 천재’ 정유미가 완성해 낸 ‘잠’의 수진은 점점 커져가는 감정의 진폭을 가감 없이 보여줘야 하는 캐릭터였다. 공포영화의 캐릭터가 으레 그렇듯 관객들로 하여금 ‘왜 저렇게까지 치닫는 것인지’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유미의 폭발하는 감정 연기는 ‘압도적’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새로운 모습을 연기한 본인 역시 캐릭터에게 압도되거나, 반대로 스스로도 의문을 갖지는 않았을까.
“저는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냥 빨리 가서 빨리 찍어야 하는데 거기서 ‘왜요? 얘는 왜 이래요?’ 이러다 보면 예산도 없고 시간도 없고(웃음). 그때그때 바로 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자꾸만 의문이 들면 오히려 더 복잡해져요. 그런데 칸 영화제에 초청 받고 거기서 처음 영화를 봤었는데요, 그때 저도 수진이를 보며 ‘쟤 왜 저래?’ 했던 장면이 분명히 있었어요. 지금은 어떤 장면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웃음), 혼자 보면서 저 혼자 막 궁시렁거릴 정도였으니까요. ‘쟤는 왜 저렇게까지 해야 돼?’ 하면서(웃음). 촬영할 땐 제가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들의 해석을 들을 때마다 너무 아쉬워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잘 표현을 했는지. 더 생각을 했었어야 했나.”
한편, ‘잠’은 정유미가 마흔 살에 선보이는 작품으로도 또 다른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각종 예능에서 ‘윰블리’(정유미+러블리의 합성어)란 애칭을 얻을 정도로 ‘러블리한’ 그가 마흔 이후 보여줄 새로운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는 팬들의 목소리도 높은 반면, 이번 작품이나 전작인 ‘82년생 김지영’에서 그랬듯 드라마틱한 변신을 계속해서 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배우로서도, 사람으로서도 ‘40’이란 숫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려 하지 않는다는 정유미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그저 제 앞에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고, 거기서 오는 좋은 에너지를 잘 쓰는 배우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옛날엔 ‘난 어떤 연기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게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고, 거기서 오는 좋은 에너지를 잘 쓰면서 힘든 시간이 오면 잘 떨쳐내고 싶어요. 사실 저는 나이 생각을 잘 안 하고 살거든요. 그걸 생각하며 살면 저 스스로 피곤해지고, 제가 나서서 먼저 막는 것도 많아질 것 같아요. 저는 그냥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넌 그냥 그러고 살아’(웃음). 마흔이 된 지금 나이로는 배우 말고 다른 직업을 택한 제 모습은 상상도 안 가요. 천직은 아니지만 너무 익숙해졌거든요. 작품 안에서 궁금한 걸 잘 느끼고, 그걸 잘 받아들이게 만들고, 그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잘 하고 싶어요. 그거면 된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