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문제만으로 정년연장 결정 힘들어…다양한 노후보장제도 함께 논의돼야”
지난 1일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공개됐다. 보험료율을 매년 0.6%포인트씩 5년간 12%까지 올리는 안과 10년간 인상해 15%까지 올리는 안, 15년간 인상해 18%까지 올리는 안이 제시됐다. 거기에 올해 63세인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6세, 67세, 68세로 늦추는 방안도 나왔다. 한마디로 더 내고 더 늦게 받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법정정년인 60세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전까지 최소 6년에서 최대 8년의 소득 공백이 생긴다. 1969년생 이후부터는 65세부터 국민연금을 수급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 현재도 소득공백이 발생하는데 새롭게 제시된 국민연금 개혁안대로라면 소득공백을 더 오래 겪어야 한다.
노동계에서는 법정정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연금 수급개시연령과 법정정년을 같게 해 소득공백을 없애자는 것이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은 ‘국민연금 수급개시연령과 연계한 정년연장을 위한 고령자고용법 및 관련 법률 개정’ 국민동의청원을 신청했다. 고령자고용법 제19조의 정년 60세 기준을 65세 이상으로 늦추고, 정년연장은 국민연금법에 따른 노령연금 수급개시연령과 일치하도록 단계적으로 늘려나가 소득공백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주 내용이다. 한국노총은 “한국은 OECD 국가 중 연금개시연령과 법정정년이 맞지 않는 유일한 국가”라며 “2013년 고령자고용법 개정으로 정년은 60세이지만 국민연금 개시연령은 계속 뒤로 늦춰지면서 최대 3~5년간 소득공백이 발생한다”고 전했다. 이어 “연금수급연령과 정년의 불일치를 해결하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정년연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유빈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소득공백 기간에는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산으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데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만 보더라도 노후 소득 보장이 잘 안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노후 소득이 보장되지 않은 기간 자체가 더 늘어나면 빈곤 문제는 더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2021년 기준 4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고령층의 빈곤율이 높은 상황에서 정년연장 없이 국민연금 수급개시연령만 늘리면 노인 빈곤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빈곤 노인에 대한 정부의 재정 부담도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정년연장을 하지 않고 노인들을 일용직‧임시직 등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모는 것이 기업과 국가 차원에서 인력 낭비라는 지적도 있다. 이지현 한국노총 교육홍보본부장은 “직장에서 퇴직한 후 대부분 일용직이나 임시직 등 안정성이 낮은 일자리로 취직을 하는데 기업이나 국가 차원에서 인력 낭비”라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더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년퇴직해서 자신이 일했던 분야가 아닌 일자리로 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손해”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55세 이상 취업자 중 37.1%는 비임금 근로자, 27.8%는 임시·일용직이었다. 반면 55세 미만 취업자 중 비임금 근로자는 17.1%, 임시·일용직은 17.4%였다.
경영계는 정년연장을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저출산‧고령화로 생산 가능 인구가 적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할 여건이 되고 의지가 있는 고령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하며, 기업 입장에서도 굉장히 긍정적이고 현 시점에서 마땅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다만 정년을 인위적으로 늘려서 모든 기업에 적용하는 방식은 기업 입장에서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100인 이상 사업장의 55.2%가 근속연수에 비례해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급을 도입하고 있고, 1000인 이상 사업장은 이 비중이 67.9%로 더 컸다. 임영태 경총 고용·사회정책본부장은 “임금체계 개편이 선행되지 않는 정년 관련 논의는 기업에 부담을 줄 우려가 크다”며 “시대적 소명을 다한 산업화 시대의 연공급 임금체계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경총은 정년연장 대신 퇴직 후 재고용을 통해 고령자 고용에 세제지원을 확대하고,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등의 조치로 기업이 자연스럽게 고령자를 재고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경총은 고용 여력이 있고 고용 안정성과 근로조건이 양호한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이 주로 정년연장 혜택을 보게 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심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임금, 안정성 등 측면에서 양극화가 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분석자료에 따르면 노조가 있는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의 평균 월 임금은 473만원에 평균 근속연수는 13년 정도인 반면 중소기업 근로자의 평균 월 임금은 247만 원에 평균 근속연수는 4.3년이었다.
경영계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퇴직 후 재고용은 모든 선택권을 기업한테만 주고, 취업에 대해 개인인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이라 바람직하지 않다”며 “교사들이 퇴직 후에 기간제 교사로 가거나 생산직은 퇴직하고 하청회사로 가는 등 재고용은 정책적으로 권고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나라에서 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정년연장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더 심화시킨다는 경영계의 주장에 대해서 김 교수는 “모든 정책은 대기업, 지불능력‧경쟁력이 있는 기업들에 혜택이 간다”며 “이중구조가 심화되는 것은 정년이 연장되지 않을 때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나며, 법이 없으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곳에 혜택을 주기 위해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년연장뿐 아니라 노후보장제도 설계와 고령노동자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논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전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60대, 70대가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이냐에 초점을 맞춰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며 “무작정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늘려서 퇴직 후에 각자도생하라는 식이면 안 된다. 정년연장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노사가 타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희 교수는 “나이 들어서까지 일해서 노후 소득을 보충해야 한다는 게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라며 “자원봉사처럼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활동을 하거나 일할 때 못 했던 경험을 하면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초연금을 잘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전했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고령 노동자가 자기 능력에 맞춰서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 임금체계 개편 등과 맞물려 정년연장을 검토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노동의 수급 상황이 10~20년 동안 급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자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 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년연장을 제도화하지 않더라도 저출산으로 생산인구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고령 인구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의견이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연금 하나만으로 정년연장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현 임금 체계 개편과 노후에 일할 수 있는 고령 인구의 노동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고령 노동자들이 어떻게 가치 있는 일을 하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지역사회에서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민주 기자 lij907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