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 고갈 우려에 국민 부담 가중 불가피…세대·직업별 민감도 달라 정치권 셈법 복잡
보험료와 수급 연령을 조정하려면 국회에서 국민연금법을 개정해야 한다.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연금개혁 과정에서 진통을 겪은 것처럼 당장의 살림살이와 노후가 달린 문제인 만큼 국민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사항이다. 특히 현재 65세인 연금수령 시기를 늦추면 은퇴 후 소득공백 기간이 길어져 정년연장 문제와도 맞물리게 된다. 총선을 반년쯤 남겨 놓은 상황에서 정치권이 상당히 부담스런 공을 떠안은 셈이다. 법 개정이 총선 이후로 미뤄질 가능성이 큰 만큼 여야가 어떤 개혁안을 선택할지가 중요해졌다.
#'이게 최선?' 치열한 갑론을박 예고
국민연금법 4조는 국민연금 재정계산 및 장기재정균형 유지 조항이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수지를 계산해 재정 전망과 연금보험료의 조정 및 기금의 운용계획 등이 포함된 국민연금 운영 전반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또 이를 해당연도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공시해야 한다. 연금보험료, 급여액, 급여의 수급 요건 등은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 균형 유지, 인구구조의 변화, 국민의 생활수준, 임금, 물가, 그 밖의 경제사정에 뚜렷한 변동이 생기면 그 사정에 맞게 조정돼야 한다.
1998년부터 보건복지부는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를 내놨다. 지난 3월 제5차 재정계산이 나왔다. 그 결과, 2041년부터는 보험료 수입만으로 연금 급여를 지급할 수 없어 적립된 자산을 팔아서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2055년엔 적립된 자산이 완전 고갈돼 그해 걷은 보험료로만 연급을 지급해야 한다.
현재는 소득의 9%(직장가입자는 근로자와 회사가 절반씩)를 보험료로 낸다. 보험료율을 높이지 않으면 2055년부터는 소득의 23%를 보험료로 내야 그 해 연급수급권자에게 약속한 급여를 지급할 수 있다. 2055년이면 27%, 2080년에는 30%까지 이 비율이 올라간다. 소득의 30%를 국민연금 보험료로 낸다면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2018년 4차 재정계산 때는 적립자산 매각과 고갈 시점이 각각 2042년, 2057년이었다. 당시에도 보험료율과 수급연령 등에 대한 개정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에도 개정이 안 되면 5년 후에는 연금 고갈시점이 더 당겨지게 된다.
기금이 소진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채 20년도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더 내든, 더 늦게 받든 국민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다만 얼마나 올리고, 얼마나 늦출지 그리고 정부 지원이나 기금운용 수익률 제고 등 가입자 부담을 줄일 다른 보완책은 없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기금 수익률 높이는 방안은 반영될 듯
현재 9%인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독일(18.6%), 스웨덴(17.2%), 일본(18.4%)과 비교(2019년 기준)하면 절반 수준이다. 하지만 나라별로 사정이 달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독일은 적립된 기금이 우리보다 훨씬 적다. 기본적인 구조가 가입자가 낸 보험료에 정부 지원금을 보태 연금을 마련한다.
적립금 규모가 아직 큰 일본 후생연금은 연금재원 가운데 가입자 보험료 비중이 69.9%다. 23%는 정부가 부담한다. 스웨덴은 연금재원의 49.2%를 정부가 댄다. 가입자가 100% 부담하는 나라는 주요국 가운데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반면 우리나라의 은퇴 전 소득대비 연금액 수준은 40%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다. 정리하면, 가장 많이 내고 제일 적게 받는 나라다.
재정계산위원회가 내놓은 안은 우선 △보험료율을 12%, 15%, 18%로 올리는 안 △수급연령을 66세, 67세, 68세로 늦추는 안 △기금운용 수익률을 0.5%포인트(p), 1%p 올리는 안이다. 경우의 수를 조합하면(3×3×2) 모두 18가지다. 하지만 더 내고 늦게 받는데도 소득대체율이 주요국 대비 여전히 가장 낮다는 문제가 지적됐다. 보건복지부가 이를 수용하기로 하면서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소득대체율 45%, 50% 두 가지 안이 반영돼도 경우의 수는 36가지가 된다. 난상토론을 거쳐도 합의안 마련이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국민연금 기금의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은 적극적으로 반영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국민연금 기금의 장기 목표수익률은 연평균 4.5%다. 기금 적립이 시작된 1988년부터 지난해까지 수익률 5%보다 낮다. 최근 10년(2013~2022년) 수익률은 4.7%로 위험자산비중이 60% 이상인 캐나다(10.01%), 미국(7.03%), 노르웨이(6.69%), 네덜란드(5.09%)는 물론 우리와 위험자산 비중이 비슷한 일본(5.78%)보다도 낮다. 위험자산 비중이 낮은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부진한 성적인 셈이다.
운용수익률을 높이면 적립기금 소진시점이 늦춰질 수 있다. 적립금이 꾸준히 연금급여 재원으로 활용될 수 있으면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은 그만큼 낮아진다. 공적기금 중 수익률이 가장 높은 캐나다연금플랜(CPP)은 1997년 충분한 적립금 확보를 위해 보험료율을 6.4%에서 9.9%로 높여 연금급여 재원의 60%는 보험료로 나머지 40%는 적립금 운용수익으로 충당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캐나다는 전문운용기관(CPP Investment Board)에 적립금을 맡기고 정부의 간섭은 최소화했다.
이 때문에 재정계산위 산하 기금발전전문위원회는 기금운용본부를 보건복지부에서 산하에서 떼어내 독립전문기관으로 만들든지 정부 입김을 배제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다만 950조 원의 기금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보건복지부가 내려놓으려 할지가 변수다.
#인상폭 정하는 시점에 총선은 이번이 처음
5년마다 이뤄지는 재정추계 바로 이듬해 총선이 치러진 것은 2004년 이후 21년 만이다. 2003년 재정추계 때는 국민연금 보험료가 9%로 오르던 중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인상폭을 정하는 시점에 총선이 치러지는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특히 여야간 대립이 극단적인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이번 총선에서 과반 확보를 위한 표 계산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은 국가 경제의 미래가 걸린 경제적 현안이지만 총선 승패가 걸려 있다면 정치권은 표 계산을 먼저 할 가능성이 크다.
총선은 지역구별로 투표가 이뤄지지만 그래도 정당 지지율이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각 세대의 표심이 중요하다. 지난해 3월 대통령 선거 결과(세대별 득표는 공식 집계가 되지 않아 방송사 출구조사 자료를 인용)를 보면 20대와 30대는 각각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가 근소하게 앞섰다. 40대와 50대는 이재명 후보가 크게 앞섰고 60대와 70대는 윤석열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인구로는 2022년 말 기준 1280만 명인 60대 이상은 연금제도 변경과 비교적 관계가 멀다. 1600만 명인 4050세대는 수급 연령에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크다. 1200만 명인 2030은 보험료율 인상에 부정적일 수 있다. 직업별 이해도 엇갈린다. 사업장 가입자는 연금보험료를 회사와 근로자가 절반씩 내지만 자영업자 등 지역가입자는 100% 본인 부담이다. 보험료율이 9%에서 15%로 오르면 소득금액 300만 원인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부담은 각각 13만 5000원에서 22만 5000원, 27만 원에서 45만 원으로 각각 9만 원, 18만 원씩 늘어난다.
근로자가 많은 지역은 소득대체율 인상 요구가 강할 수 있고, 자영업자가 많은 지역은 보험료율 인상에 부정적일 수 있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면 정부가 재정으로 일부를 지원해 국민들의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세수부족으로 재정지출에 민감해진 정부가 재정투입에 난색을 표할 가능성이 크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