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정재단 이사회, 가족 관여 불가 정관 조항 삭제…임기 만료 후 스스로 연임 결정한 이사진 자격도 논란
'세계를 이끄는 한국인' 배출을 꿈꾸며 '1조 기부왕'으로 불리다 최근 100세 나이로 별세한 이종환 전 삼영화학그룹 회장이 남긴 유훈이다. 하지만 공염불이 될 수도 있다. 관정재단 이사회가 이 전 회장 사망 후 불과 일주일도 안 돼 가족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의결 과정에 석연찮은 지점들이 보여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절차의 적정성을 다시 따져볼 전망이다.
#발인 나흘 만에 "가족은 안 돼" 유훈 백지화
이 전 회장은 2000년 관정재단을 설립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재 약 1조 7000억 원을 쾌척하며 '기부왕'으로 불렸다. 관정재단은 아시아 최대 장학재단으로 노벨상 수상자 육성을 목표로 꾸준히 기부를 이어 왔다. 현재 누적 장학생이 1만 2000명에 달하고, 박사학위 수여자도 750명 수준이다. 이들에게 지급한 장학금액은 2700억 원으로 추산된다.
'벌 때는 천사처럼 못해도, 쓸 때는 천사처럼'은 이 전 회장이 자주 해오던 말이다. 그는 돈을 버는 대로 관정재단에 출연하며 면학도 육성에 주력했다. 이런 취지에 공감하며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박희태 전 국회의장,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이 한때 이사로 합류해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은 9월 13일 타계했다. 비록 그토록 바라온 노벨상 장학생은 못 보았지만 꿈은 간직한 채 떠났다. 그리고 '관정재단에 가족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유훈을 남겼다. 재단 경영권을 상속하는 대신 사회에 공헌해 투명하고 지속가능한 운영을 당부했던 셈이다. 사망 3년여 전부터 인터뷰 등에서 공개적으로 밝혀 온 내용이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관정재단은 설립자의 유훈을 계승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9월 19일 임시이사회를 열고 '가족은 관여할 수 없다'는 정관 20조를 없애기로 뜻을 모았다. 이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꼭 엿새, 장례 후 삼우제를 지낸 지 불과 사흘 만에 나온 결정이다. 이사회의 예기치 않은 판단에 재단 안팎에선 사태를 매우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
현재 관정재단 이사는 총 5명이다. 2022년까지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신동렬 이사장(64)을 중심으로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71), 기업인인 봉 아무개 씨(55), 대학교수 권 아무개 씨(64), 공기업 직원 권 아무개 씨(53)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가운데 이 전 회장의 혈연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직계비속도 아닌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가족들의 운영 개입 활로를 열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에 가족들의 뜻이 반영된 행보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특히 이 전 회장의 장남인 이석준 삼영화학그룹 회장(69)이 결국 재단을 운영할 수 있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이사회가 이 전 회장 사망 이전부터 이런 조치를 구상해온 정황도 엿보인다. 일찍이 이 전 회장은 다음 이사장으로 권영걸 현 대통령 직속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을 지명한 바 있다. 그는 대학총장을 지낸 뒤 고등학교장으로 자리를 옮긴 독특한 이력의 교육 전문가다. 이 전 회장 방침에 따라 내정자로서 언론에도 보도됐다.
그러나 권영걸 위원장은 영문도 모른 채 재단에서 퇴장해야 했다. 2023년 9월 8일 그를 이사장으로 선임한다는 안건으로 이사회가 소집됐지만 3명의 이사진이 회의장에 나타나질 않아 정족수가 미달한 탓이다.
이에 따라 신동렬 이사장이 직을 유지했고, 이사회는 이 전 회장 발인 나흘 뒤 '전원 참석 만장일치'로 삼영화학 오너 일가의 참여를 의결했다.
이 전 회장은 권영걸 위원장 선임 안건이 무산되고 닷새 뒤 세상을 등졌다. 권영걸 위원장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해 드릴 말씀이 없다"며 "이종환 회장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된 만큼 현재는 애도부터 하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말을 아꼈다.
신동렬 관정재단 이사장은 "재단 이사들과 논의와 협의를 거쳐 준칙에 따라 정관을 개정했다"면서 "지금은 몹시 뒤숭숭한 분위기라 설명을 드릴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수상한 이사회…'의결 무효' 가능성도
교육·장학사업을 하는 관정재단의 주무관청인 서울시교육청은 이사회의 정관개정 신고를 접수해 곧 심의할 방침이다. 이사회의 의결 절차가 적정하게 이뤄졌는지는 물론 유훈 내용을 고려해 이 전 회장 가족들도 정관 개정에 동의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계획이다.
관정재단의 순항을 예단할 수는 없다. 현 이사진이 자격을 갖췄는지부터 논란이 불거졌다. 이는 8월 11일 열린 '이사 연임 건 심의' 이사회가 발단이다. 당시 이사 3명의 연임이 결정됐으나, 이들의 임기는 하루 전인 8월 10일 끝난 상태였다. 즉 임기 만료된 인사들이 다음 날 이사로 또 참여해 자신들의 연임을 의결했다는 의미다.
이 밖에 가장 문제가 된 '가족 참여 가능' 관련 이사회의 경우 신동렬 이사장이 미리 소집을 요구한 자료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규정대로라면 이사장은 이사회 개최 최소 7일 전에 이사진에 소집을 통보해야 한다. 이사 전원이 집회를 통해 소집을 요구할 때에만 예외다.
물론 예외 조항에 따라 긴급 소집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이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9월 15일까지 장례가 치러졌다. 이틀 지난 17일에는 삼우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이사진이 '9월 19일에 이사회를 열자'며 따로 모였다는 가정은 일반적이지 않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이제 사안을 접수한 만큼 전반적으로 살펴볼 부분이 많아 자세한 얘기는 전할 수 없다"면서도 "지도·관리 기관으로서 관계자들을 부르거나 실사 혹은 서류조사를 할 수 있으므로 원칙대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제가 발견되면 경고나 의결 무효 혹은 수사의뢰 등의 조치가 규정상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관정재단의 2022년 기준 총 자산은 6401억 1822만 원이다. 이 가운데 약 5700억 원이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 재산이다. 장부가액일 뿐 각각의 시장가치를 평가하면 1조 원이 넘는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2022년 공익사업에는 국내 대학생 장학금으로 18억 6200만 원, 국외 장학금 100억 원, 서울대 발전기금 1240만 원을 사용했다.
[반론보도] ‘관정 이종환교육재단 설립자 유훈’ 기사 관련
본 언론사는 2023년 9월 26일자 “‘가족은 관여하지 말랬거늘’ 삼영 이종환 ‘1조 기부왕’의 버려진 유훈”이라는 기사, 2023년 10월 5일자 제1639호 “누가 왜 이사장 직인 찍었나… ‘1조 기부왕’의 관정재단 수사 임박”이라는 기사를 보도한 바 있습니다.
위와 같은 기사에 대하여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이종환 회장께서 작고하기 5일 전 장남인 이석준이 명예이사장(이사)으로 자신의 사후 재단법인에 참여하라는 새로운 유훈을 남겼다”라고 알려 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