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비상임’ 탓 법망 피해, 그 사이 또 다른 피해자 발생…“전국서 유사사례 실태 조사 필요”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계속하다 실제 폭행까지 이어졌다. 전남 해남군 한 농협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가해자는 임원이다. 피해자는 사측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지만 결과는 '위반 없음'. 가해자가 '비상임' 이사라는 이유였다. 임원이 사과를 거부하며 결국 피해자가 일을 쉬게 됐고, 복직을 앞두고 수사기관에 도움을 청했다.
최근 한 지역 축협 조합장이 직원들을 '노동조합 가입' 등을 이유로 폭행한 사건이 공분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농협에서도 비슷한 피해를 토로하는 비명이 이어진다. 지역단위 농협을 중심으로 조합장 등 임원들의 갑질 및 직장 괴롭힘 문제가 수년째 도마 위에 올랐으나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라 근본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조합장실에서 때리고 고객 보는 데서 또
폭행 피해자 A 씨에게 전남 해남 H 농협은 2001년부터 몸담은 '평생직장'이다.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에도 가입해 열심히 활동했다. 당연히 회사의 노동법 준수 및 직원 권리 확대 등을 위해서였다. 노조 활동을 하며 회사와 크고 작은 다툼이야 몇 차례 있었으나 노사교섭 등을 통해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 2020년 대립이 불거졌다. A 씨는 노조 전임자로서 '근로시간 면제자' 신분이었다. 노동조합법에 따라 노조 활동에 쓴 시간을 임금손실 없이 업무로 인정받는 지위다. 하지만 H 농협은 A 씨의 7개월분 임금을 미지급하고 노사교섭도 10차례 넘게 불응했다. 결국 A 씨와 노조는 그해 9월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구체 신청을 했다.
2021년 1월 H 농협 이사 선거 후 갈등이 더 심해졌다. 선거 과정에서 금품이 오갔다는 논란이 일었다. 당시 A 씨는 진상 규명을 촉구한다는 입장 등을 냈다. 실제 일부 이사 출마자는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H 농협 일부 임원 사이에선 노조에 대한 감정이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A 씨도 임원들 사이에서 소위 찍힌 신세가 됐다. 급기야 2021년 7월 16일 일이 터졌다. H 농협 비상임 ㄱ 이사가 무슨 일인지 격앙된 상태로 노조원 출신인 한 직원을 찾기 시작했다. A 씨가 말리며 '자리에 없다'고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ㄱ 이사는 A 씨에게 화풀이를 시작했다.
ㄱ 이사는 A 씨를 조합장 사무실로 불러냈다. 이 자리에서 ㄱ 이사는 거친 말과 함께 A 씨를 향해 '고정 간첩이다' 'X맞아 볼 테냐' '확 쳐버리겠다' '뭐가 잘났냐'는 등의 폭언을 쏟아냈다. 함께 있던 조합장 만류에도 "형님, 얘(A 씨)랑 친하냐"며 욕설을 멈추지 않고 폭행까지 벌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ㄱ 이사가 몇 분 뒤 다시 찾아 왔다. 분이 덜 풀렸는지 창구에서 일하던 A 씨에게 또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주변에 고객들이 상담을 받고 있었지만 아랑곳 않은 채 손에 쥔 물건을 A 씨 얼굴에 집어던졌다. A 씨는 얼굴과 목에 상처를 입었다.
#직장 괴롭힘 방지법 '구멍'
A 씨는 H 농협에 ㄱ 이사의 직장 괴롭힘을 신고했는데 황당한 결론이 나왔다. '위반 없음'이었다. H 농협은 "직장 괴롭힘 요건은 가해자가 근로기준법상 사용자 또는 근로관계가 있어야 한다"며 "비상임 이사는 사용자 또는 경영담당자가 될 수 없고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관계법에 적시된 괴롭힘 대상자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회사 상근직이 아니라 직장 괴롭힘 방지법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농업협동조합법에 따르면 농협의 이사회는 조합원 자격심사, 법정 적립금의 사용, 사업 계획과 수지예산 변경, 간부직원 임명 등에 대한 의결권을 갖는다. 비상임 이사도 이사회에서 발언 및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경영상 영향력을 갖춘 위치지만 허술한 제도가 빌미를 제공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비상임 이사는 각 사업장마다 근무 형태가 다르다보니 근로기준법이 규정한 업무 관계성 등도 회사 사정에 맞춰 제각각 살펴봐야 한다"며 "이에 따라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대상에서 제외될 여지는 있다"고 설명했다.
정작 근로복지공단은 A 씨가 ㄱ 이사의 폭력 등으로 정서상 장애 등을 앓게 됐다는 점을 인정하고 2022년 5월 그를 산업재해 피해자로 승인했다. 이에 A 씨는 현재 일을 잠시 쉬며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반면 ㄱ 이사는 H 농협에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채 현재까지도 비상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임기는 2025년까지다.
소민안 한국공인노무사회 부회장은 "만약 성희롱 등 사건이었다면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가해자가 누구든 신속한 처벌이 이뤄졌을 것"이라며 "반면 직장 괴롭힘 방지법은 사업주도 근로자도 아닌 임원을 제재할 규정을 두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보완 입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A 씨가 일을 쉬며 고통을 견뎌내는 사이 H 농협의 부당함은 최근에야 일부가 확인됐다. 2020년 9월 전남지방노동위원회에 제기한 구제 신청이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서울행정법원까지 향한 끝에 2023년 9월 15일 사측의 잘못이 인정됐다. 각 노동위원회와 법원은 일제히 H농협의 임금 미지급 및 교섭 해태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A 씨는 곧 복직을 앞두고 더욱 불안하다. 그는 "노조를 부정적으로 바라봐 온 ㄱ 이사를 회사 보호도 없이 마주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공포"라며 "ㄱ 이사가 사과를 거부해 뒤늦은 2023년 5월에 결국 수사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현재 광주지방검찰청 해남지원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ㄱ 이사의 비상임 신분이 직장 괴롭힘 규정에서는 사실상 면죄부로 작용하며 피해자는 A 씨 이후에도 늘었다. H 농협의 다른 직원도 2023년 9월 ㄱ 이사를 폭행 등의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파악됐다. 그 역시 노조 출신으로 H 농협 이사 선거 당시 ㄱ 이사와 마찰을 빚었던 인사로 알려졌다.
#"내가 KBO 선수도 아니고…" 반성 없어
ㄱ 이사는 전혀 잘못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일요신문과 통화에서 "과거 이사 선거 때 저를 모함하는 이들 때문에 경찰 조사까지 받은 바 있어서 감정이 좋지는 않다"면서도 "노조가 H 농협 앞에서 엄정 수사를 촉구하는 시위까지 벌였는데 적어도 저는 무혐의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합장 사무실에서 A 씨에 욕을 조금 했지만 폭행은 없었다"며 "창구에서 물건을 집어던지긴 했어도 머리를 살짝 스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특히 "내가 KBO(프로야구) 선수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을 정확히 맞히겠냐"며 "저의 폭행 때문에 A 씨가 정서 불안 등을 겪는다던데, 그런 사람이 무슨 노조를 하나"라고도 항변했다.
ㄱ 이사는 또 "그 정도 행위 때문에 정서 불안을 앓았다는 사실을 인정해 산업재해를 승인한 근로복지공단 판단이야말로 잘못된 처사"라며 "A 씨는 회사는 쉬면서 최근에도 노조의 다른 집회에 종종 참석하던데, 근로복지공단이나 기자 양반이나 상식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 같은 사건이 전국 농협에서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공개한 '2021∼2023.8 농협 직장 괴롭힘 행위 징계 현황'에 따르면 이 기간 전국 농협에서는 총 38건의 징계가 이뤄졌다. 이 가운데 30건이 폭언 및 폭행이고 나머지는 부당 인사 혹은 부당 업무 지시 등이었다.
이는 직장 괴롭힘이 인정된 사례일 뿐이다. A 씨와 비슷한 이유 혹은 사측과 다툼이 진행 중인 곳까지 포함하면 숫자가 크게 늘어난다. 일요신문이 확인한 사례만 약 10곳이다. 여기에는 직장 괴롭힘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원과 임원 밥 짓기와 빨래 및 성추행 등에 시달린 사례도 포함됐다.
이에 대해 서삼석 의원은 "농협 내 갑질 등 문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면서 "법과 농협의 인사준칙에 따라 바람직한 사내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무는 아니지만 공공기관처럼 실태조사를 실시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