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외적 영역’ ‘대책 가동’ 등 이유로 회사 상대 손해배상 청구 각하…오는 11월 23일 항소심 진행
'일요신문i'가 입수한 1심 판결문에 따르면 SC제일은행에서 근무했던 가해 남성 B 씨는 2018년 8월부터 2019년 7월까지 한 달에 2~3번 정도 업무상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 A 씨의 팔뚝을 주무르고 허리 부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2019년 5월 31일부터 같은 해 6월 1일 춘계 체육행사에선 B 씨가 A 씨의 찢어진 청바지 틈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넣어 무릎과 허벅지 경계 부위의 살을 만진 것으로 전해졌다. 2019년 7월 1일에는 A 씨와 B 씨, 사내 직원 C 씨가 회식자리 이후 2차로 이동하지 않고 귀가하는 상황에서 C 씨가 먼저 가자 B 씨는 A 씨에게 “시청역까지 걷고 싶다. 같이 걸어가자”고 한 뒤 청계천 인근에서 A 씨의 팔뚝을 주무르며 “살찐 데도 없고만, 다이어트할 필요도 없겠는데”라고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B 씨가 A 씨의 왼쪽 어깨를 감싸 잡아당겨 안고 허리를 감싸며 A 씨의 가슴 밑 부분을 손바닥으로 꼬집듯이 잡았다가 놓는 등의 행동도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2019년 7월 2일 A 씨가 B 씨와 출장 이야기를 나누던 중 B 씨가 “다음에 출장 갈 때는 방 같이 쓰자, 침대는 하나 더 놔줄게”라는 말을 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SC제일은행을 대상으로 한 피해자의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 결정에는 ‘업무 외적 영역에서 개인의 일탈 여부’와 ‘SC제일은행의 성희롱 방지를 위한 예방대책 가동’이 주된 근거가 됐다.
1심 재판부는 일부 성희롱 사안에 대해선 ‘B 씨의 업무 집행 중 이뤄졌다는 점, 강제추행 범죄 피해의 경우 은행의 공식 춘계 체육행사 중 A 씨가 행사진행 업무를 보는 과정에서 직장 상사인 B 씨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에선 사무집행 행위와 관련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회식 이후 B 씨가 개별적으로 귀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업무 외적 영역에서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 관계자는 “(1심 재판부에서) 사무집행 관련성을 다소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으로 보여 우려스럽다”며 “비서 업무 특성상 상사가 공식 회식 이후 귀가 과정에서 수행을 요구하거나 업무 이후 점심식사 등을 함께하자고 요구했을 때 ‘공식 업무가 아니니 하지 않겠다’고 거절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텐데 (1심 재판부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관계자는 “(회식 이후가 업무 외적 영역이라고 본 것은) 과도하게 좁혀서 판단한 것 같다”며 “보통 (성비위 사건이) 업무와 관계가 있는 상사, 인사권을 행사하거나 관리감독 하는 사람을 통해 발생하면 업무관련성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성희롱 방지를 위한 예방대책 가동에 대해 SC제일은행 측은 사건 발생 전 성추행 예방을 위해 노력했다는 입장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SC제일은행 측은 “(성희롱 사안이) 사무집행 관련성이 인정되어도 (사내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무관용 원칙 천명 및 이에 따른 신속한 징계처분, 직장 내 성희롱 대응 절차의 마련 및 홍보 등을 통해 성희롱 방지를 위한 필요한 조지를 다한다”고 전했다. 또 사건 발생 후 보호의무와 관련해 “모든 보호조치를 충실히 이행했고 A 씨가 은행에 요청한 사항을 모두 보장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A 씨는 ‘일요신문i’와 통화에서 “성희롱 사안을 (인사부에) 처음 언급한 뒤 회사에 소문이 퍼지고 몸이 안 좋아져 병가를 썼다”며 “병가 중 B 씨의 징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B 씨가 ‘SC제일은행 모 임원’ 타이틀을 달고 언론 인터뷰를 했다.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 내가 직접 노동조합(노조)에 찾아가 사실을 밝혔다”고 토로했다.
이어 “노조 측에서 사실을 알게 된 뒤 B 씨에게 성희롱을 당한 다른 직원이 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면서 “노조가 노조 소속 모든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성희롱 사실을 전한 뒤 B 씨가 퇴사 의사를 전했다”고 덧붙였다. A 씨는 SC제일은행에서 주장하는 ‘모든 보호조치 이행’은 B 씨가 퇴사한 뒤 이뤄졌다고 부연했다.
앞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관계자는 “사용자 책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봐야 할 것 중 하나는 피해자가 사건을 알렸을 때 사측이 적절하게 대응했는지 여부”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SC제일은행이 법적 책임 대상이 안 되더라도 소속 기관 구성원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조직문화가 성비위 사건에 대해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며 성차별, 성추행 등을 용인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강조했다.
정소영 기자 upjs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