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너무 하고파 안정적 직장 떠나 배우로 전업…‘독립영화계 전도연’ 별명 여전히 욕심나
“워낙 자극적이고 빠른 소비들이 큰 요즘이잖아요. 저희 작품이 누군가에겐 위로로 깊게 다가갈 수도 있을 거고, 저 역시 정말 좋은 이야기이자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많은 사람에겐 사랑받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처음 공개됐을 때 저희가 다 같이 모여서 보는데 작품이 너무 좋은 거예요(웃음)! 그때 애들한테 그랬어요. ‘이거 진짜 속된 말로 폭망(큰 실패)이어도 괜찮아, 너무 좋은 작품이잖아. 우리 애썼어, 괜찮아. 즐겁게 보자’ 그랬는데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다니, 너무 감사했죠(웃음).”
11월 3일 공개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이상희는 일명 ‘차지(Charge)쌤’이라 불리는 명신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간호사로 빈틈없고 깐깐한 선배 박수연을 맡았다. 내과 3년 차에 정신건강의학과로 전과한 초보 정신병동 간호사 정다은(박보영 분)의 실수에 때로는 매섭게, 때로는 따뜻하게 당근과 채찍을 오가는 모습을 보이며 시청자들에겐 ‘좋은 선배의 본보기’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연기한 이상희가 실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근무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의 현실 연기가 더욱 주목받은 것은 물론이었다.
“간호사로서는 큰 병원에서 1년 남짓 근무하고, 작은 병원에서 2년 정도 근무했는데 저는 정말 일 못 하는 간호사였어요(웃음). 극 중 수연이 다은이에게 말하는 ‘이제는 그만 죄송해야 해’란 말은 진짜 제가 듣던 말이에요(웃음). 사실 간호사는 계획이 굉장히 명확해야 하고, 모든 일을 그 안에서 차례대로 해야 하다 보니 써야 할 물건들도 오차 없이 제자리에 딱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물건을 제자리에 둔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웃음). 그것 때문에 엄청나게 혼났던 기억이 나네요. 작품에서 보이는 간호사들이 뛰지 못해서 하는 종종걸음이나 ‘이제 그만 죄송해야 해’라는 대사에 제 무의식이 묻어난 부분이 있어요(웃음).”
캐릭터의 특성상 활동 무대가 정신병동 안에 한정돼 있던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 안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행운이었다고 했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 출연한 배우들이 이 작품에도 중복 출연한 덕이었다.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살짝 눈치 없지만 친구들에게 든든한 힘이 돼 줬던 양대수 역의 임재혁은 여전히 눈치 없는 먹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공철우로, 좀비 사태가 벌어진 효산시를 통제하는 계엄사령관 진선무 역의 김종태는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존경받는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임혁수를 맡았다.
“(임)재혁이는 정말 천의 얼굴이죠. 아래위로 스무 살을 왔다갔다 한다니까요(웃음). 제가 재혁이 보고 그랬어요. ‘야, 너는 고등학생도 무리가 없고 사십 대도 무리가 없다. 진짜 굉장한 얼굴을 가졌다’했더니 재혁이가 ‘누나 나 여기서 사십 살 아니에요!’ 그러더라고요(웃음). 또 임 교수님 역의 김종태 배우님은 연기에 대한 고민을 저와 많이 나눠 주셨어요. 사실 수간호사(이정은 역)님과 임 교수님이 술 싸움을 하는 장면에서 ‘누나’ 운운하는 대사는 원래 대본에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 분은 교수고, 한 분은 수간호사지만 분명 그 둘도 레지던트와 신규였던 시절이 있었을 거잖아요. 극 중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그런 과거가 조금 묻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저 대사를 넣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 고민과 생각들을 공유하는 시간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계속 마주해야 하는 또 다른 인물들에 환자를 빼놓을 수 없다. 등장하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서 자기 모습을 투영했다는 이상희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로 다른 배우들이나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망상 장애를 앓는 김서완(노재원 분)을 꼽았다. 그는 작품 시청이 끝나고도 가장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캐릭터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킨 캐릭터다.
“작품이 끝나고도 가장 오래도록 생각나는 건 역시, 김서완 님이었어요. 현실에서 마주하는 힘든 순간들 속에서 나는 이만큼 해내고 싶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고, 그 시간을 무던히 오래 견디다가 ‘그냥 내가 만든 이 세계에서 행복할래’라면서 떠나는 마음이 이해되더라고요. 만일 그때 그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까, 저 사람은 자기가 그리는 그 세계로 가는 게 더 행복할까…. 여러 생각들이 들었어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상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의 괴리는 비단 김서완이란 캐릭터만이 가지는 무력감은 아니었을 터다. 실제로도 많은 청춘들이 이 무력감에 깊은 공감을 했던 만큼, 인생에 한 번쯤 쓰디쓴 실패를 맛본 이들이라면 이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간호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벗어던지고 연기에 투신한 이상희 역시 비슷한 실패를 겪었었기에 김서완을 조금 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실패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저는 이 길이 맞는지 고민해 본 적은 없어요. 물론 좀 더 이야기 중심에 와닿아 있는 인물이나 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있었겠죠. 제 욕심 만큼은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건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원한다면 전 계속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이정은 언니한테 들은 얘긴데, ‘나중에 호호 할머니 되면 단역하면 되지! 현장에 계속 있고 싶으면 그렇게 계속 있으면 돼’ 그러시더라고요(웃음). 제 생각도 그래요. 내 욕심만큼 안 되더라도, 내가 원하면 계속할 수 있을 거라고요.”
이상희의 이런 선택에 걸맞은 행보는 독립영화계에서부터 출발했다. 2010년부터 크고 작은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2016년 영화 ‘연애담’으로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신인연기상 수상하면서 꾸준히 단단한 작품 목록을 쌓아 올려온 그의 별명은 ‘독립영화계의 전도연’. 앞으로 더 넓은 무대에서 보게 될 그를 기대하고자 한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상희’란 이름 석 자로 기억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질문에 이상희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그 수식어를 앞으로도 계속 가지고 싶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정말 그렇게 되고 싶고, 전도연 배우님을 또 너무 좋아하거든요. 사실 그때는 정말 닿을 수 없는 완전히 남이었으니까 그런 말을 하고 다녔기도 한데, 지금은 조심스러워요. 지나가다 뵙게 되면 어떡해요(웃음). 사실 어떻게 보면 저는 목표랄 게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예전엔 있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런 걸 갖게 되면 제 욕망이 자꾸 앞서나가다 보니 제가 맡은 역할에 방해가 돼요. 그게 눈에 보여 버리면 그건 제 욕망이지 제가 연기하는 이 인물의 욕망이 아니니까요. 지금은 목표점을 갖기보단 그저 제가 맡은 바, 맡게 되는 자리에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또 많이 배우고 싶어요. 연기가 너무 좋으니까 연기를 계속하고 싶다는 것 외엔 저는 목표가 없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