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죽인 연쇄살인마 쫓는 황순규 역 열연…“‘기생충’은 내 평생 영광, 잘 기생하다 가고파”
“제가 사실 공포영화도 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런 작품을 찍는다면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장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귀여우니까(웃음). ‘기생충’ 때도 비 오는 날 문광이 초인종 화면으로 등장할 때 저는 아무리 봐도 이 장면이 무섭지 않고 귀엽게 느껴져서 ‘사람들이 안 무서워하면 어쩌지’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도 그렇고 다들 ‘전혀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런 이정은이 ‘운수 오진 날’에서 보여준 순규의 모습엔 두려움보다 메마름이 먼저 묻어난다. 아들을 연쇄살인마의 손에 잃은 어머니지만 골방 안에 틀어박혀 아들의 영정사진을 매만지며 눈물만 쏟기엔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탓이다. 경찰들은 순규의 말을 슬픔에 미쳐버린 피해자 유족의 정신나간 헛소리로 여기고, 아들의 지인들 역시 그가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고 치부한다. 엄마는 집을 박차고 나가 직접 발로 뛰며 살인자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다루는 피해자 가족들은 성별 불문 이런 상황에 놓이면 감정에 호소하거나 너무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할 텐데 순규를 보면 모든 신에서 상황을 굉장히 짧게 파악하고 바로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요. 그렇게 추진력은 가졌지만, 현실적이게도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죠. 사실 순규가 총으로 직접 다 복수할 수 있었으면 이런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았겠지만요(웃음). 그래도 제가 액션을 워낙 좋아해서 이번 작품 찍으면서도 욕심을 많이 부렸거든요. 뛸 때도 막 담벼락이 있으면 펄쩍 뛰어넘으려고 하고 그랬는데 그때마다 감독님이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순경이나 형사가 아니라 엄마예요’라면서 자중하라 하시더라고요(웃음).”
‘운수 오진 날’은 택시기사 오택(이성민 분)이 드물게도 거액을 제시한 장거리 손님 금혁수(유연석 분)를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 가다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공포의 주행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전날 돼지가 무더기로 쏟아지는 꿈을 꾸고 받은 장거리 손님이기에 ‘운수가 오지게 좋다’며 기뻐했지만, 그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운수가 그저 ‘오지기만’ 한 날이란 걸 깨닫게 된다. ‘운수 오진 날’의 전반부는 이 두 사람이 택시를 타고 도로를 달리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가 되기 때문에 금혁수의 흔적을 쫓는 순규 역의 이정은은 이성민과 유연석의 연기를 현장에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대신 촬영분을 모니터링하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아 혼이 쏙 빠질 정도였다고.
“저는 차 안에서 혁수가 하는 모든 말들이 다 소름 돋았어요. 저런 사람이 제 옆에 있었으면 전 소리 질렀을 거예요. 1, 2화를 유연석 배우랑 같이 모니터하는데 그거 보면서 ‘너 이런 사람이었어?’ 그랬다니까요(웃음). 연석이는 상대가 뭘 해도 잘 받아낼 수 있는 친구라서 같이 연기하기가 편했는데 비웃는 표정이 너무 얄미웠어요. (순규가 가진 총으로) 빵 쏴버리고 싶더라니까요(웃음). 그런데 그 표정이 나오면 감독님이 정말 너무 좋아하셨어요. 연석이도 그런 비주얼을 마음껏 표현하는 걸 보면 새로운 역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전혀 안 무섭고 정말 친절하고 다정한 친군데 말이에요(웃음).”
극 중에서 등장하는 여러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이정은의 순규는 가장 처음으로 혁수와 몸싸움을 벌인다. 남성과 여성, 20대의 젊은 피와 중년, 무기 사용에 능한 연쇄살인마와 처음으로 총을 잡아본 보통 사람으로 상반된 두 캐릭터의 싸움에선 양쪽의 팽팽한 긴장감보다 한쪽의 처절함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그런 신의 실제 촬영 비하인드는 어땠을까. 유연석의 다정함을 믿고 기대서 갔었다는 이정은은 “머리론 액션이 다 그려지는데 몸이 하나도 안 움직여서 혼났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제가 장르물을 이렇게 많이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젊었을 땐 액션에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지금처럼 팔다리가 내 맘대로 안 되는 나이가 되니까 또 액션이 하고 싶어지네요(웃음). 어떤 결핍이 생기면 그걸 해보고 싶은 야망과 욕망도 같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제가 엄마께 ‘나 몸은 늙었는데 마음은 아직 20대야’라고 말했는데 엄마가 ‘야, 그건 그냥 50대인 거야’ 그러시더라고요. 몸이 늙었는데 마음은 젊다고 말하면 그냥 늙은 거래요(웃음).”
이정은과 이성민, 그리고 유연석이라는 연기 괴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은 작품인 만큼 모든 시청자들이 이들의 연기에 엄지를 치켜 들었다. 다만 딱 하나 불만을 가진 점이 있다면, 초반의 전개가 다소 ‘고구마’(목이 막힌 것처럼 답답한 이야기)였다는 것. 짧고 강렬하면서 자극적이며 신속한 결과만을 바라는 요즘 세대들에겐 복수로 향하는 순규와 택의 길고 지난한 여정이 영 마땅찮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결로 복수의 끝은 무조건 ‘완벽 처단’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해진 것도 ‘운수 오진 날’의 사람들의 입맛을 쓰게 만들기도 했다.
“이야기에서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의 고민이기도 하죠. ‘왜 이렇게 고구마를 먹이면서 이런 얘길 만들까.’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는 알지만 만일 이 이야기가 그들의 당면 문제가 된다면 그렇게 칼자루를 함부로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 이야기가 진부하기만 할까요? 그걸 충분히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사람들의 고민과 생각을 보려고 후기를 전부 다 봤어요. 당연히 이런 (비판) 반응이 나올 것이라고도 생각했고, 우리 모두가 그걸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긴 고민의 끝에서 여전히 ‘정의’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이정은은 내년에도 숨돌릴 틈 없이 뛸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준비 중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를 마치고 나면 다시 또 새로운 사람의 선한 이야기 속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렇게 언제든지 연기할 수 있다는 게 배우로서 복된 삶이라 말한 이정은은 자신의 배우로서 마지막을 장식할 말을 묻자 “잘 기생하다 갔다”라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기생충’으로 너무 많은 사랑을 받다 보니 사람들이 제게 ‘기생충’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는데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건데, 넌 그냥 네 평생을 기생충으로 남아도 돼’라고(웃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너무 좋은 작품이었잖아요. ‘기생충’ 이후 제가 비중이 높은 작품을 고르지 않을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니 더 홀가분해요. 어차피 작품 활동은 끊임없이 할 건데, 인기가 사라지면 그 과거를 빨리 버리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죠(웃음). ‘기생충’은 제가 버린다고 하더라도 계속 제게 붙어다닐 테니까요. 앞으로도 ‘기생충’처럼 작품 여기저기에 잘 붙어서 살아야겠다 싶어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