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 여성과 남성, 생각해 보면 함께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함께 잘 살아보자고 빌린 이념체계에 기대 서로를 비난하고 증오한다. 이렇게 미워하고 갈등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 그러나 현실은? 죄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 뿐더러 나아가 ‘죄’와 ‘의견 차이’조차 구별하지 않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한편에서는 권력에 기대 자기의 죄를 ‘의견 차이’라 우기고, 자신과 다른 입장이면 아예 ‘죄’라고 규정해버린다. 그러니 다른 편에선 그 ‘죄’를 지은 죄인을 미워하는 일을 ‘정의’로 알고 살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이라는 책이 나왔다. 거기서 나는 생명과 사람을 존중하는 달라이라마의 태도가 어디서 나오는지 보았다. 그것은 사소하기도 하고 소소하기도 한 대목에서였다.
“저는 보통 8시간에서 9시간 정도 잡니다. 어때요? 너무 많은가요?”
달라이라마가 8시간을 넘게 잔다니, 놀라지 않았는지. 우리는 영적 지도자에 대해 묘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어서 잠도 정복하고, 음식도 정복하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겨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그런 우리의 편견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8시간에서 9시간이나 잔다는 이야기를 편하게 꺼내는 달라이라마를 보고, 무엇보다도 그의 정직성, 나아가서 자기기만을 정복하고 있는 힘에 놀랐다. 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정직하기가 쉽지 않다. 타인의 요구나 기대를 감당할 수도, 저버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거기서 자기기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직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바다 같은 깨달음을 가진 스승 ‘달라이라마’라는 옷도 잊고, ‘관음의 현현’이라는 페르소나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기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존재이니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달라이라마는 그 이후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지적으로 그렇게 불안했는데도 잠을 방해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속으로는 어느 정도 평온함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주된 요인은 제 훈련과 매일매일 하는 명상입니다. 제 하루는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시작하고, 적어도 4시간 동안 명상하는데 주로 분석명상을 합니다. 제 명상의 일부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을 시각화해서 그들을 향한 이타심을 키우는 겁니다.”
매일 명상을 하며 평온함을 잃지 않는 일, 달라이라마에게도 그 일이 힘이란다. 그 힘으로 중국의 정치지도자에게까지 이타심을 낸다는 것이다. 그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을 시각화해서 그들을 향한 이타심을 키운다고 말한다.
독특한 것은 그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중국의 정치지도자에게도 ‘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개심을 정복하고 있으니 적이 아니라 그저 ‘결정권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향해 이타심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평온해지고 평온해지면 적을 ‘적’으로 봐서 갈등을 키우는 마음의 적개심이 실체가 아님을 보는 것 같다. 그렇게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평온하게 하는 훈련이 되어야 행동과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 같다.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행동과 사람을 구분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행동에 관한 한, 우리는 반대하고 대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우리의 자비와 걱정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