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판 일찍 닫히는 남학생에 여성호르몬 억제제 처방…안전성 논란으로 혼란 가중
의료계 설명에 따르면 성장호르몬은 우리 몸 속 뇌하수체에서 생산되는 호르몬으로 키를 성장시키고 뼈와 근육의 형성을 돕는다. 성장호르몬 생산이 충분하지 않거나 분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또는 성장호르몬 분비는 정상이지만 다른 원인으로 키가 작은 경우 주로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가 이뤄진다. 소아내분비학회에 따르면 성장호르몬 주사는 소아의 저신장증이나 터너증후군, 만선신부전증 등의 치료에 사용되는 것으로 정리된다.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는 키와 몸무게 측정, 혈액검사, 성장판 검사 등을 거쳐 전문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받을 수 있다. 비용은 한 달에 70만~80만 원 선으로,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받는데 1년으로 따지면 1000만 원 정도 드는 셈이다. 건강보험 적용도 제한 기준이 있다. 성장호르몬 결핍증이 있고 키가 하위 3% 이내, 성장 지연 질환 등을 가진 경우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고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성장호르몬 주사에 대한 부모들의 치솟는 관심은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예혜련 서울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전문의)은 “건강문제가 아닌 단순히 키 성장 자체에 대한 상담을 원해 소아청소년과 외래 진료를 찾는 분들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예상 키나 성장호르몬, 성호르몬 억제제의 실제 효과나 부작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의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혜련 과장은 “질병이 없다 하더라도 일반 아이들의 키 성장을 위해 이러한 호르몬약제를 투여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부모님들이 늘고 있어 성장호르몬 치료에 대한 과열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가 질환 치료 목적이 아닌 단순히 키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처방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국정감사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내 의료기관에서 처방되는 성장호르몬 바이오의약품이 일반인에 대한 효과가 확인되지 않은 채 단순히 키가 작은 소아‧청소년에게도 처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따르면 국내에서 사용되는 24개 성장호르몬 바이오의약품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은 없었다.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보건의료연구원에서 진행한 ‘소아청소년 대상 키 성장 목적의 성장호르몬 치료 연구에서도 “허가범위를 초과한 성장호르몬 사용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해 권고하지 않으며, 오직 임상연구 상황(터너증후군 등 성장호르몬이 부족한 환자 대상)에서만 적용돼야 한다”며 단순히 키가 작은 일반인에 대한 처방은 권고하지 않고 있다.
당시 국감에서 김영주 의원은 “일반인에게 임상시험조차 한 적 없는 성장호르몬 바이오의약품이 마치 성장하는 일반 소아나 청소년들에게 효과가 있다고 광고, 처방하고 있는 병원들의 문제가 심각하다”며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의약품의 초기 허가 목적과 다르게 오남용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관리·감독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장호르몬 주사 처방 건수는 최근 5년간 빠른 속도로 늘어나 우려를 키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소아 성장약품 처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성장호르몬 주사 처방 건수는 총 19만 건으로 2018년 5만 5075건 대비 3.45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식약처에 보고된 성장호르몬 주사 관련 이상 사례 역시 2018년 320건에서 2022년 1604건으로 약 5배 뛰었다.
한편 일부 의원에서는 어린이‧청소년의 키 성장 치료를 위해 여성호르몬 억제제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일요신문i’ 취재 결과, 현재 서울 강남권과 경남 창원지역의 일부 의원에서 유방암 치료나 배란 유도제로 쓰이는 여성호르몬 억제제를 키 성장 치료에 사용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약제는 ‘레트로졸’ 성분이 들어 있는 약으로 여성호르몬 생성을 감소시키는 기능이 있어 보통 폐경 후 여성의 유방암 치료제나 배란 유도제 등으로 쓰인다. 그런데 성장판이 거의 닫힌 10대 초반의 남자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성장호르몬 주사와 함께 이 여성호르몬 억제제가 일부 병원에서 처방되고 있는 것이다.
소아내분비 전문의들은 여성호르몬 억제제가 키 성장 치료에 사용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뼈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빠른 아이들에게 해당 약이 사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부작용 위험도 있어 공식적인 치료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소아내분비과 전문의는 “해당 약이 여성 호르몬을 다운(감소)시켜 성장판이 닫히는 걸 조절하기 위해 쓰인다고 하는데 불안과 걱정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의원에서 사용되고 있다”며 “알려진 부작용도 있고 관련 연구 결과도 많다. 단순히 키 성장을 위해 사용하기엔 근거가 없는 약”이라고 지적했다.
전문의들은 키 성장을 위한 호르몬 치료가 충분히 검증된 요건에 맞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치료에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한다. 전문의들에 따르면 보통 의학적 효과를 기대해 성장호르몬이 사용되는 질환은 기본적으로 성장호르몬분비 자체에 문제가 있는 질환이나 저신장을 유발하는 기저질환에 해당된다. 또 성장호르몬 검사 결과는 정상이지만 키가 또래에 비해 3백분위수(하위 3%) 미만에 해당하는 특발성저신장증에도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만약 이런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음에도 호르몬 처방이 이뤄지는 것은 효과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고 전문의들은 강조한다. 예혜련 과장은 “성장호르몬 주사치료를 계획하고 있다면 아이가 매일 주사를 맞는 통증과 수고를 감내해야 할 만큼 검증된 치료인지에 대해 반드시 소아내분비전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충분히 상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