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건축 활성화 지원책이 혼란 불러…접으려니 내홍 등 장애물 ‘수북’...진행하려니 시공사 유치 ‘별 따기’
최근 윤석열 정부가 잇달아 쏟아내는 재건축 활성화 지원책이 전국 리모델링 추진 단지를 크게 흔들고 있다. 과거 극도의 재건축 억제 기조 속에 차선책으로 리모델링 방식 재정비를 택했던 노후 아파트 단지들이 다시 재건축으로 선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사업을 접으려니 해산 절차 등 장애물이 많고, 강행하기엔 건설시장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곳이 부지기수다. 현장에선 “공중에 붕 떠버린 신세다”,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는 식의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리모델링은 건물의 핵심 뼈대를 그대로 쓰면서 나머지 세부 구조를 새로 짓는 방식으로, 재건축에 비해 사업 허가 문턱이 낮고 비용이 적게 드는 장점이 있다. 반면, 증축이나 세대수 증가에 제한이 있는 아쉬움은 감수해야 한다. 한국리모델링협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1월 기준 전국의 153개 노후 아파트 단지(총 12만 1229세대)가 리모델링 조합설립을 완료했거나 인가를 앞둔 상태다. 조합은 못 꾸렸지만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곳까지 더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난다. 수도권 1기 신도시의 경우에는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353개 단지 가운데 약 30개 단지가 리모델링을 추진 중이다.
리모델링에서 재건축으로 선회를 꾀하는 단지들은 소유주들의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부터 ‘산 넘어 산’이다. 기존 리모델링 조합 지도부나 이를 지지하는 조합원들의 반대를 넘어서는 것부터 쉽지 않다. 특히 리모델링 조합에 소속된 상태가 아닌 ‘비조합원’ 소유주들이 별도의 재건축 추진 비대위를 꾸려 리모델링 조합 해산을 요구하는 경우 극심한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일쑤다. 하지만 같은 단지 내에 재건축 조합과 리모델링 조합이 동시 존재할 수 없는 여건상 어느 한쪽의 포기는 불가피하다. 강남구 대치2단지의 경우 일부 소유주들이 지난 1월 23일 강남구청을 찾아 리모델링 조합이 해산 여부를 결정하는 총회를 열 수 있도록 행정지도를 해달라며 민원 요청을 넣었고, 이후 지난 5일 조합 지도부가 강남구청에 총회 개최 계획을 제출했다.
이처럼 기존 리모델링 조합의 해산 여부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올해 곳곳의 단지에서 이어질 전망이다. 조합 지도부가 원하지 않더라도 일정 기한 내에 해산 결정 총회를 열어야만 하는 현행 법규정 때문이다. 2020년 개정된 주택법에 따르면 재정비 사업 조합은 설립 인가를 받은 날부터 3년이 되는 날까지 사업계획승인을 받지 못한 경우 총회 의결을 거쳐 해산 여부를 의무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이에 따라 서울에선 기존 76개 리모델링 추진 단지 중 약 23곳이 올해 안에 조합 해산 결정 총회를 열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동구 둔촌현대2차·고덕아남·길동우성2차, 송파구 가락쌍용1차 등이 올 상반기 내 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총회 계획을 밝히지 않은 단지들도 많아 자칫 담당 구청 등 행정당국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부 총회를 통해 리모델링 추진위나 조합 해산이 최종 결정 되더라도 장애물은 더 있다. 대표적으로 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 채무에 발목이 잡히는 경우다. 조합 해산을 위해선 그동안 시공사로부터 빌려 쓴 초기 착수금 등 사업추진비를 상환해야 하는데 액수 규모가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달하기도 해 상환에 엄두를 못 내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리모델링 추진위를 해산한 송파구 거여1단지의 경우 추진위를 해산하면서 집행부가 쓴 수억 원의 사업비를 조합원들이 부담하게 돼 논란을 키운 바 있다. 강남구 대치2단지는 시공 계약을 맺었던 HDC현대산업개발, DL이앤씨 등과 지난해 계약 해지 소송을 하면서 앞서 대여 받은 총 112억 원의 사업비를 상환하게 됐다.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보는 전국 리모델링 추진 단지들 중에는 ‘사업 강행’ 쪽에 수를 던져보다가 이마저도 상황이 녹록지 않자 ‘사면초가’ 신세를 호소하는 곳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사업 비용 마련이나 시공을 책임져 줄 건설사 찾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게 문제다. 그동안 리모델링 사업을 수주해온 시공사들은 고공행진 중인 건설물가, 아직 높은 시중금리 요인으로 사업 수익을 내기가 더욱 어려워지자 더욱 엄격한 기준으로 사업장 ‘옥석 가리기’에 나섰다. 송파구 풍납동 강변현대의 경우 지난해 5월부터 시공사 선정 입찰에 나섰지만 어느 한 곳도 참여한 곳이 없어 최근 조합 해산 검토에 들어갔으며, 서초구 잠원현대훼밀리와 영등포구 문래동 현대3차, 서대문구 홍제한양 등도 시공사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자연스레 리모델링 사업에 대한 내부 동의율이 매우 높은 극소수 단지 위주로만 시공사들의 사업 참여가 기대되는 추세다. 이동훈 한국리모델링협회 정책법규위원장은 “소유주의 4분의 3 이상이 사업에 동의해야 리모델링 사업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점, 2차적으로 소유주들의 매도청구분이 많으면 금융사로부터 사업비 대출을 받는 데 제한이 많아지는 점 등이 시공사들의 중요 관건”이라면서 “사업을 추진하는 단지가 이런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강하다보니 소유주들의 심리적 동의율이 거의 90% 이상 되는 단지를 찾으면서 사업성 우수 단지를 가려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노후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 시장의 전반적 침체가 한동한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일부 전문가는 “리모델링 시장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다”며 다소 거친 수준의 진단까지 내놓는다. 치솟는 분담금을 소유주가 감당할 수 있는 단지 수 자체가 줄어드는 데다, 시공사들 입장에선 초기 투자금 증가로 사업 수익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 시장의 수요자도, 공급자도 동반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상황에 반전을 기할 정책적 변수가 딱히 보이지 않는 점도 중요 포인트다. 재건축에 쏠린 현 정부의 노후 아파트 재정비 지원책 기조가 한동안 굳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현재 정부는 노후 아파트 재건축에 대해 안전진단 면제 추진, 용적률 최대 150% 상향 등 파격적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 반면 리모델링에 대해서는 안전진단 규정을 유지하고, 3개 층 이상 증축할 수 없는 제한 규정도 계속 두고 있다. 지난 5일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리모델링 추진단지에서도 규제 완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질의에 대해 “기존 대책들이 있기에 리모델링 촉진 정책은 고민하지 않고 있다”고 확인하기도 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은 “실제 소요되는 공사비, 건폐율 등 실제 아파트 단지의 주거 여건이나 세대수 증가분 등 사업 이후의 결과물을 감안하면 지금으로서는 리모델링에 대한 유인이 크지 않고, 기존 조합원들도 재건축으로 돌아설 여지가 크다고 봐야 한다”면서 “당분간 리모델링 사업에 대한 수요가 한정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