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아기는 뭐가 불편한지 끊임없이 울고, 장손은 자꾸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꺼림칙했던 의뢰인은 파묘를 요청하며, 관을 꺼낸 후엔 이장하지 말고 관 채로 그대로 화장해달라고 한다. 요청한 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부자라는데, 묏자리의 주인이 물려준 부가 어쩐지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예상대로 그는 나라를 팔아먹고 그 대가로 부와 권력을 취한 매국노였다.
심리학자 스캇 펙도 말했다. 부와 권력이 영적 성장의 수단이 되지 않고 목적이 되면 삶이 풍요롭게 되기는커녕 단지 야비하고 편협한 사람을 만들 뿐이라고. 딱, 맞다.
어쨌든 엄청나게 행세했던 사람의 묘지인건데 묘지는 전문가들조차 예상할 수 없는 험지다.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곳, 맹수들과 뱀들의 땅, 그것도 산꼭대기 어두운 곳이다. 혼자는 오기 힘든 곳, 함께라도 오기 싫은 곳. 그 자리는 좋은 자리일까, 나쁜 자리일까.
얼마 전에 풍수의 대가 최창조 선생이 세상을 떴다. 그는 내가 진행했던 라디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몇 번을 놀랐다. 우리 같은 사람은 도무지 읽어낼 길 없는 땅의 기운, 바람의 기운을 읽어내는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읽어낸 것을 진실하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마치 땅이 어머니인 듯, 물이 생명인 듯, 바람이 이방인인 듯, 묏자리가 집인 듯 이야기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묘하게도 빠져들게 된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점은 마구잡이 개발로 한반도의 산야가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길 때 마치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처럼 느끼는 그의 감각이었다. 내가 본 그는 전통적 세계관의 힘을 간직한 운명적 인물이었다.
선생에게 들은 인상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는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왜 특정한 사람이 왜 그렇게 편한 자리 혹은 강한 자리 혹은 비틀린 자리 혹은 쓸쓸한 자리와 인연이 있는지를 이해하자는 것이었다. 그가 ‘파묘’를 봤다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풍수를 하는 사람들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본다. 여기 한반도 이 땅에서, 대륙을 향해 뻗어가야 할 기상을 읽은 것이다. 영화 ‘파묘’에서 파묘가 이루어진 자리는 바로 그 호랑이 척추에 해당하는 자리란다. 당연히 그 자리는 강한 자리다.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리이니 보호해야 하는 자리이지 그 자체로 나쁜 자리일 리 없다. 그런데 그 자리가 무섭도록 공포를 조성하다니. 왜?
그 요충지에 이제 의지로 없을 매국노 영가가 들어가 죽어서도 매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제국주의의 귀신에 붙들려 있었다. 멀쩡한 제 조국을, 제 조국의 아들딸들을 팔아 누린 영광은 그렇게 한심한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부를 누리고는 있지만 그 그림자에 시달리고 있는 후손, 편치 않은 후손이다. 삶의 모습과 죽음의 모습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목숨은 너무나 소중해서 하늘에 닿아있다고 한다. 크고 깊은 진실한 힘, 그 하늘에 닿아있는 사랑을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표현했다.
“오, 사랑이여, 너만이 신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오, 너의 속박은 얼마나 강한가. 신을 묶어놓을 수 있을 만큼 강했으니. 너는 신을 인도해왔고, 너의 화살로 상처를 입혔다.”
기억에 없어도 우리는 그 하늘같은 사랑에 이끌려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삶에서 자꾸 허방을 만난다면? 잎이 시들거든 뿌리를 돌봐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꾸자꾸 허방에 빠질 때, 자신이 어디에 서있는지 잘 모를 때,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그 친숙한 이름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들이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고, 그들의 삶의 허방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 풀어보는 일에 해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