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 사태 이후 중소 화주들 운임 부담 가중…정시성 준수 방침 ‘제미나이 협력’ 부산항 패싱도 악재
국내 최대 규모 수출입 물류 플랫폼인 트레드링스에 따르면 홍해 사태 이후 선사들의 정시성은 지속 하락세다. 2024년 1월 기준 정시성은 전월 대비 5.1%포인트 하락한 51.6%를 기록했다. 이는 2022년 9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선박들이 늘어나면서 평균 선박 도착 지연 일수도 6일을 넘어섰다. 글로벌 상위 13개 컨테이너 선사 중 가장 정시성이 높은 선사는 54.7%를 기록한 CMA CGM이다. 국내 유일한 국적 선사인 HMM(옛 현대상선)은 45%를 밑돌며 대만의 양밍해운과 함께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85% 수준이었던 팬데믹 이전과 비교하면 정시성이 크게 낮아졌다. 정시성이 낮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중소 규모 화주들의 부담이 커졌다. 물류업계 한 관계자는 “선박의 도착 일정이 계속 밀리면 그때 그때 시장에서 형성되는 스팟 운임이 오르게 된다”며 “물동량이 적은 중소 규모 화주들은 정기적인 계약에 의한 우대운송계약 운임 적용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선사와의 교섭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수준의 운임을 감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히 모든 무역 계약서에는 최종 선적기일이 있기 때문에 화주들 입장에서는 일정을 맞춰 화물을 싣는 게 중요하다. 앞서의 물류업계 관계자는 “신선도가 중요한 식품의 경우에는 잘못하면 바이어들이 화물 수령도 못한 채 폐기비용까지 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어와 화주 모두 선사들이 정시성을 최대한 맞춰주길 원한다”라며 “희망봉으로 우회하면서 일정이 길어지고 있지만 선사들이 그만큼 운항 중인 선박 수를 늘리지는 않고 있기 때문에 화물을 기한에 맞춰 싣기가 쉽지 않다”라고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선사들이 원가 상승을 피하기 위해 선박을 추가로 투입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와 관련, 구교훈 한국국제물류사협회 회장은 “부산신항에서 로테르담항까지 왕복 90일이 소요되는데 일주일마다 배가 출항을 하면 약 12척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홍해 사태로 운송 기한이 왕복 120일까지 길어진다면 일주일마다 출항하게 만들기 위해 선박을 17척까지 투입해야 하는데 선사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선사들이 친환경 이슈 탓에 선박 공급을 쉽사리 늘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내 한 유통 대기업 관계자는 “국제해사기구(IMO)가 온실가스 규제 기조를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친환경 선박이 부족한 선사들이 배를 최대로 돌리지 못하는 상황으로 안다”며 “규제의 수위를 매년 높이고 있고 공급망 지연 이슈는 계속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정시성과 관련된 이슈들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시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내년에 출범 예정인 제미나이 협력이 칼을 빼들었다. 제미나이 협력은 글로벌 2위 선사 머스크와 5위 선사 하팍로이드가 새로 결성하는 해운동맹이다. 제미나이 협력은 기항지(목적지로 가는 동안 잠시 들르는 항구)를 줄여 운송 시간을 단축해 화주들과 신뢰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제미나이 협력에 따르면 한국의 부산항과 일본, 베트남, 대만이 기항지에서 제외된다.
환적허브에서 제외되는 부산항 등은 ‘셔틀 서비스 항구’로 한 단계 격하될 전망이다. 제미나이 협력 선박이 부산항에 직접 들어오지 않는 대신 부산항은 중소형 컨테이너선에 짐을 실어 이를 직접 기항지에 넘겨주는 기능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제미나이 협력의 선박을 이용하는 국내 수출입 업체는 운송 단계를 한 단계 더 거치게 돼 비용 소모가 커지고 운송 시간도 늘어난다.
국내 수출입 화주 입장에서는 악재다. 부산항에 기항하는 글로벌 선사 수가 줄어들면서 화주들의 선택지도 감소하게 되기 때문이다. 구교훈 회장은 “대형 선사들이 안 들어오게 되면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우리나라 화주들은 운임을 더 높게 주고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부산항이 제미나이 협력의 환적항만에서 제외되면 다른 선사들이 추가로 이탈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으로 HMM 입장에서도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다. 부산항으로 화물을 집결하던 글로벌 화주들 입장에서도 부산항의 중요성이 크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전준우 성결대 글로벌물류학부 교수는 “부산항을 드나드는 컨테이너선이 줄어들면 대화주들이 부산항으로 화물을 보낼 이유가 없다. 이 경우 HMM이 취급할 물량도 감소하게 될 우려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HMM이 기항하고 있는 대만의 가오슝 터미널도 패싱 대상이다. HMM은 1996년부터 가오슝항 전용 부두에 대한 장기 임대 계약을 유지해왔다. 대만 현지법인을 통해 가오슝항에 두 개의 터미널을 운용하던 HMM은 지난해 9월 가오슝항의 3개 부두에 대한 임대계약을 20년(15년+옵션 5년) 연장했다. 가오슝항이 HMM의 주요 기항지 중 하나였던 만큼 이중으로 악재가 닥친 셈이라고 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영증권 리포트에 따르면 이미 HMM의 컨테이너 사업부 소석률(화물적재율)은 60%대로 감소한 상황이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려면 소석률이 85%는 넘겨야 한다. 적재 물량이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은 불안 요소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장기운송계약비율이 70~80%대에 달하는 머스크 등과 달리 HMM의 장기운송계약비율이 유달리 낮은 편이라는 점도 부담스러운 요소라는 지적이 나온다. 안정적으로 운영 계획을 짜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류업계 다른 관계자는 “선사 입장에서는 중소 화주보다 물동량을 많이 갖고 있는 대화주를 영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대화주들은 항구에서 항구로만 운반해주는 HMM보다는 항구에서 내륙까지도 운송해주는 종합물류기업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며 “HMM이 서비스 제공 측면에서 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류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국내 선사들이 가장 간과하고 있는 게 화주들에 대한 마케팅이다.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통해 화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장기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이 점을 소홀히 하고 있어 우려가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HMM 관계자는 “홍해 사태로 공급망 붕괴 이슈가 생긴 상황이고 도착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배를 빨리 몰면 환경오염물질이 과배출되기 때문에 쉽지 않다”면서도 “정시성을 맞추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