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2월 30일자 “민족적 의의, 겨레로서의 양심이라 해”…아들 조태열 장관 “정치 문제 대화 나눌 기회 없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1년 4개월 전인 1958년 12월 24일엔 ‘2·4 파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보안법 파동’으로 정국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보안법 파동은 자유당 정권이 1958년 12월 24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을 폭력으로 몰아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신보안법)을 비롯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킨 정치 사건이다.
여당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신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보다 독소조항이 많은 법” “언론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민주당을 위시한 야권과 언론·시민단체 등은 격렬한 반대시위와 대대적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1959년 1월 신보안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파동은 잠잠해졌다. 분노와 좌절로 응어리진 민심은 휴화산처럼 가라앉았다. 그 휴화산은 1년 3개월 지난 1960년 4월 19일 활화산으로 대폭발했다. 1958년 보안법 파동이 1960년 4·19 혁명을 잉태한 셈이다.
최근 일요신문은 1958년 보안법 파동 당시 ‘청록파’ 조지훈 시인이 보안법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한 정황을 발견했다. 바로 같은 청록파였던 박목월 시인이 쓴 1950년대 말 미공개 일기에서다. 두 시인은 절친했다.
일기 속엔 박목월 시인(1915~1978년)보다 다섯 살 연하인 조지훈 시인(1920~1968년)이 보안법 반대 서명운동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1958년 12월 30일자 일기에 “지훈 등 무슨 국민운동에 署名(서명)하는 것을 보았음”이라 적혀 있다. 신보안법이 국회에서 강행 처리된 12월 24일을 엿새 지난 때였다. 조지훈 시인이 당시 ‘보안법반대국민대회준비위원회’가 진행한 보안법 반대 서명운동에 동참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보안법 파동은 왜 일어났을까. 시계를 1950년대 중반으로 되돌려보자.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504만여 표(득표율 69.98%)를 받아 당선됐다. 당시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는 216만여 표(30.01%)를 얻었다. 이 대통령의 정적(政敵)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1957년 11월 22일 이근식 내무부 장관은 “우리나라 주권을 무시한 평화통일론자”를 처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신보안법)을 입안 중이며 평화통일을 주장한 정당을 내사 중이라고 밝혔다. 결국 1958년 1월 12일 ‘평화통일구호 및 간첩 박정호와 접선한 혐의’로 조봉암 등을 체포했다. 한 달 후인 2월 16일엔 우리나라 최초 민간항공사 대한국민항공사(KNA) 여객기가 북한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5월 치러지는 제4대 총선을 서너 달 앞둔 시점이었다.
이 같은 경색 국면에서 자유당과 민주당은 총선에서 무소속과 군소정당에 타격을 줄 입후보금기탁제 등 서로의 이해를 절충한 선거법개정안(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4대 총선은 협상선거법으로 치러졌다. 결과는 국회의원 233석 가운데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통일당 1석이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의도대로 무소속과 군소정당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개헌 추진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 확보엔 실패했다. 자유당의 정치적 위기는 진보당 정당등록취소, ‘사상계’ 함석헌, ‘코리아타임즈’ 장수영, ‘동아일보’ 최원석 기자 구속 등으로 이어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따르면 “자유당은 다가올 1960년 차기 정·부통령 선거의 선행책으로 야당의 언론제한을 주제로 하는 신국가보안법을 구상하고 야당 측이 고집하는 내각책임제 개헌공작을 봉쇄함과 아울러 대공 사찰을 강화할 것을 기도했다.”
전문 42조인 신보안법 골자는 △보안법 적용대상과 이적행위 개념 확대 △군인, 공무원 반항·선동 행위 처벌 △헌법상 기관의 명예훼손 처벌 △군 정보기관의 간첩수사 법적근거 마련 △보안법 범법자 취임자격 박탈에 교육기관과 보도기관 추가 등이었다.
여기에 정부는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 또는 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해 적시 또는 유포함으로써 인심을 혹란하게 해 적을 이롭게 한 자는 5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언론통제 조항을 추가했다.
정부는 1958년 11월 18일 신보안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자 “언론 자유와 인권보장을 침해하는 것”(한국신문편집인협회), “이 법안의 적용범위가 광범·모호하며,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법조항이 있고, 소송절차도 무시했다”(대한변호사협회), “정부가 제출한 ‘국가보안법’안은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보단 언론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생활을 위협할 해점이 심대하다”(민주당) 등 반대성명이 잇따랐다.
자유당은 야권 반대를 묵살한 채 법안통과를 강행했다. 12월 19일 오후 3시 3분 전 자유당 의원들은 야당 의원들이 법제사법위원회에 늦게 참석한 것을 틈타 법안을 무수정 통과시켜 본회의에 회부했다. 이에 격분한 민주당 등 의원 80여 명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범야권 각 정당과 사회단체, 재야인사들은 12월 23일 보안법반대국민대회준비회를 구성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12월 24일 오전 국회의사당 주위를 무장 경관들이 삼엄하게 에워쌌다. 일반인 통행도 차단했다. 자유당 한희석 국회부의장이 개회 직전 경호권을 발동했다. 저항하는 농성 의원들 한 사람씩 지하실에 연금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상돈·조일환·허윤수·박순천 의원 등 12명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회 안엔 자유당 의원들만 남아 ‘신보안법’을 비롯해 새해 예산안, 지방자치법 개정안 등을 2시간 만에 일사천리 통과시켰다.
야당 의원들은 ‘2·4 의결무효확인’ 성명을 내며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했다. 원 외의 보안법반대국민대회준비위원회(국민대회준비위)도 12월 30일 규탄성명을 발표하는 한편 1959년 1월 7일 시위계를 내고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했다.
이에 정부는 국민대회준비위 간판을 강제로 철거했고 1월 7일 집회를 불허하며 초강수로 맞섰다. 시위를 막기 위해 장갑차까지 동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월 7일 국민대회준비위가 계획한 시위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날 미도파 앞 노상시위를 비롯해 서울역 앞 대한여자국민당 시위 등 수천 명의 시위대가 전단을 뿌리며 거리로 나섰다. 대구·부산·청주 등 지방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중앙의 수십 만 학생들도 이에 호응, 경찰 제지를 무릅쓰고 시위를 일으켰다”라고 쓰고 있다.
국민대회준비위가 시위를 계획했던 1월 7일 박목월 시인은 일기에 “세상이 소란하다. 보안법 데모 때문에 신문이 떠들썩”이라고 당시 정국을 짧게 기록했다.
보안법 파동은 1959년 1월 15일 ‘신보안법’ 발효일을 고비로 잠잠해졌다. 신보안법이 발효된 지 일주일 지난 1월 22일 박목월 시인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지훈도 외로운 모양이다. ‘우리가 정치에 관여할 바가 아니다. 다만 민족적인, 근본적인 의의가 있는 일에, 자기 태도를 갖는 것은, 겨레로서의 양심이다’ 라고 지훈의 말. 또한 그가 보안법 반대하는 태도라 한다.” 지식인 조지훈의 고뇌가 강하게 전달되는 대목이다. “지훈도 외로운 모양”이라고 표현한 데선 박목월 시인 역시 ‘외로운 모양’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59년 5월 19일 한근조 민주당 의원 등 13명은 “보안법 파동에 대한 책임과 국회 정상화를 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기붕 국회의장 사퇴권고 결의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부결됐다. 결국 보안법 파동은 한희석 국회 부의장이 사퇴하는 선에서 일단락됐다.
1955년생인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조지훈 시인 막내아들이다. 조 시인이 보안법 반대 서명을 할 당시 조 장관은 세 살이었다. 조태열 장관은 훗날 부친 조지훈 시인으로부터 보안법 파동이나 반대 서명 동참 사실 등에 대해 들었을까. 일요신문의 질문에 조 장관은 4월 9일 문자메시지를 통해 “아버님은 제가 중1 때(1968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정치·사회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집안에서 봬온 아버님 모습과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아버님 삶 자체에 대해선 남기신 글과 문우, 제자들 입을 통해 들은 게 전부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라는 입장을 전해왔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지조의 시인 조지훈
‘청록파’ 조지훈 시인은 1920년 12월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조동탁.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개화지식인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1938년 혜화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39년 정지용 추천으로 ‘문장’ 3월호에 시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이 실리며 등단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이 해에 박목월 시인과 처음 교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6월 6일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은 ‘청록집’을 출간했다. 청록집은 “자연을 예찬하거나 인생을 성찰하는 시풍이 담긴 서정시들 총체”로 평가받는다.
경기여고 교사,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했다. 1956년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만성 기관지염으로 고생하다 1968년 5월 17일 새벽 영면했다. 향년 48세. 시집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 앞에서’ ‘여운’ 등이 있다. 문학이론서 ‘한국문화사서설’ ‘신라가요연구논고’ ‘한국민족운동사’ 등을 썼다. 수필집 ‘돌의 미학’ ‘창에 기대어’ ‘시와 인생’ ‘지조론’ 등도 유명하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