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내가 징역 1년이라면 박정희는 100년”
▲ 1977년 10월 21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 하원에서 로비스트 박동선 씨에 대해 증언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
저자 안치용 씨는 “박정희 정권의 대미로비는 한국을 살리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이후 자신의 독재에 대한 비판을 막겠다는 생각이 화를 자초했다”라고 평가한다. 훗날 한국 정부의 로비 사실을 폭로했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얻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호에 이어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비사를 소개한다.김형욱은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정보기관의 수장으로는 최장 기간이다. 저자 안치용 씨는 “뚱뚱한 체구 탓에 김형욱의 별명은 ‘나는 돈까스’였지만 그의 행적을 세밀히 살펴보면 ‘여우’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 이후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난 김형욱은 훗날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중정 시절 자신이 벌인 일들로 내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고 결국 미국 망명길을 택한다.
1973년 거액의 부정축재 재산을 챙겨 미국으로 도피한 김형욱은 1977년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릴 때까지 4년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청문회가 열리기 보름 전, 그는 <뉴욕타임스>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한국 정부의 대미로비와 정권 비화를 흘리면서 몸값을 키워나갔다. 특히 김형욱은 코리아게이트의 중심에 있던 로비스트 박동선이 사실은 중앙정보부 에이전트라고 최초로 밝히면서 프레이저 청문회는 전적으로 김형욱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7년부터 이듬해까지 이뤄진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김형욱의 활약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듯하다. 1977년 6월 첫 번째 청문회에 참석해 미 의회 측과 한 차례 탐색전을 끝낸 그는 다음 청문회가 있기 직전 다시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하고 “한국 정부에서 나의 청문회 참석을 저지하려는 작전이 있었다”라고 폭로해 한미 양국의 긴장 관계를 고조시키기도 했다.
물론 한국 정부도 두고만 보지 않았다. 당시 황선필 문공부 대변인은 “배신자가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 한국 국민들은 아무도 배신자의 파렴치한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논평을 내며 적극 반박했다. 하지만 실제 박 전 대통령 측은 김형욱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라” “미국을 떠나 제3국으로 간다면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 “증언을 2주간 미뤄 달라”고 요구하며 김형욱의 청문회 참석을 저지했다.
김형욱은 프레이저 청문회 외에도 2차례에 걸친 상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했는데 이때 증언을 살펴보면 중앙정보부가 얼마나 사사롭게 운영돼 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78년 상원 윤리위 청문회에 참석한 김형욱은 미국 내 중정 책임자였던 양두원을 발탁한 이유로 “그가 골프를 잘 쳤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해병대 대령이던 양두원은 한 골프장에서 우연히 김형욱과 만났고 이 자리에서 프로선수 못지않은 골프실력을 선보이며 그의 눈에 띄었다. 이에 김형욱은 정보 분야에 경험이 없었던 양두원을 2~3개월의 기본 교육만 받게 한 뒤 서독대사관 참사관으로 파견했다. 양두원은 서독대사관으로 있으면서 동백림 사건(1967년 서독과 프랑스 등에서 공부하던 유학생들이 북한 측과 접촉한다는 이유로 반강제적으로 연행, 납치했던 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김형욱은 6차례에 걸친 미 청문회 증언을 통해 로비스트 박동선의 대미로비 활동, 정관계의 검은 뒷거래,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 등을 소상하게 털어놓았지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치명적인 폭로는 피했다. 이후 발간된 회고록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생활 부분은 거론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과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던 미 의회로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었고 김형욱의 재산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며 그를 추궁하기도 했다. 미 위원회는 김형욱의 재산이 1500만~2000만 달러에 이르고 이를 조세피난처인 바하마 등에 숨겼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김형욱은 “내가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1년 감옥에 간다면 박정희는 100년간 감옥에 가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김형욱은 청문회 도중 해외에서 달러를 밀반입하다 세관에 걸려 체포되기도 했다. 뒤뚱뒤뚱 걸어오는 동양인의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한 세관이 그를 연행해 조사했더니 양말 속에 6만 달러가 넘는 현금을 숨겨 들어온 것이다. 김형욱은 프랑스의 카지노에서 딴 돈이라고 둘러댔지만 안 씨는 “김형욱이 스위스 UBS에 비밀계좌를 개설하고 이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전했다.
프레이저 소위원회 역시 김형욱이 스위스 은행 계좌 개설을 위해 제네바로 갔고 이를 증명해 줄 명함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명함에는 김형욱의 딸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등이 기재돼 있었는데 안 씨는 “2012년 8월, 해당 주소를 확인해 본 결과 세계 최대의 프라이빗뱅크인 스위스유니온뱅크(UBS)의 주소였다. 김형욱은 UBS에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거듭 밝혔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피한 지 1년도 채 안 돼 이후락 역시 한국을 빠져나간다.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난 뒤 한국에 머물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을 안심시킨 뒤 김포공항을 통해 몰래 미국 망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이후락을 받아들이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 측과 협상에 나섰고 이후락은 조용히 산다는 조건과 안전을 보장받고 귀국하면서 망명 파동은 일단락됐다.
▲ 2003년 3월 26일 경기도 하남에서 일요신문 카메라에 포착된 이후락 씨. 이종현 기자 |
스위스와 함께 바하마도 한국의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후락은 미국 망명을 시도하기 직전까지 바하마에 체류했는데 서울을 떠난 지 20일도 지나지 않아 이미 살 집을 구한 것은 물론 현지에서 합작사업까지 모색했다. 또 미국 시티뱅크는 1975년 김형욱의 고객카드를 작성하면서 그가 바하마에 “400만~600만 달러를 예치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안치용 씨가 “아마도 바하마에 중앙정보부 비밀계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추측했던 것도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끝내 미국의 망명 승인을 얻지 못한 이후락은 출국 70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밀협상을 통해 침묵을 조건으로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타전한 비밀문서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이후락에게 귀국해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했고 ‘서울에 오지 말고 집(경기도 광주)에서 조용히 살아라’라고 지시했다”고 기록했다.
이후락 역시 귀국 이후 김종필과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입 닫고 조용히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오뚝이’라는 별명답게 1978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공화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가 하면, 영원한 앙숙이던 김종필 전 총리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는 등 정치권에 종종 모습을 비추다 지난 2009년 10월 뇌졸중과 노환으로 숨졌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안치용 씨 인터뷰
“미 의회 보고서에 깜짝 놀랄 증거가…”
-박정희 정권 당시 대미로비를 취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평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에 관심이 많았다. 김 전 부장의 미국 내 행적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 대미로비에 관한 청문회 보고서를 찾기 시작했고 이를 국내 출간된 책과 대조해 보니 3분의 1 정도가 실리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후 한국의 대미로비를 밝히기 위해 프레이저 청문회뿐 아니라 한국의 중정활동, 정치자금, 인권문제를 다룬 청문회까지 모두 살펴보게 됐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는 방대한 양의 미국 청문회 자료와 비밀 메모가 수록됐는데 그 양과 기간이 어느 정도였나?
▲프레이저 청문회는 종합보고서 1권에 부록 2권, 부속책자 8권 등 모두 11권이 발간됐다. 대부분 200~700페이지 정도지만 일부 부속책자는 1000페이지가 넘어가기도 했다. 상하원 청문회 부속책자는 4권 역시 각각 10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이 밖에도 한국문제를 다룬 미 의회 보고서는 매우 많았는데 수록된 증거를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약 2년 정도에 걸쳐 자료를 수집했고 집중적으로 검토한 시간은 10개월 정도다.
-미국을 향한 로비 활동은 필수불가결한 활동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대미로비에 관한 칭찬할 점과 비판할 점이 꼽자면 무엇인가?
▲미국에서 로비하지 않는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다.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1978년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한국이 미국에 로비하게 된 동기를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은 우리가 도저히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유일한 절대적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 미국으로부터 좌익성향으로 오해를 받았지만 케네디 대통령에게 월남파병을 제의하면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받게 되고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3선 개헌 등 독재자의 길을 걸으면서 미 의회로부터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미국의 권력이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에서 의회로 옮겨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의 의원매수의혹이 불거졌을 때 미 의회가 더욱 발끈했던 것이다. 불법 대미로비가 노출된 것은 로비스트들의 지나친 행동도 문제였지만 행정부 인사와 민간인 로비스트 간 시기와 질투, 미국에 정착하는 방편으로 망명을 택했던 일부 외교관 등의 폭로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현재 한미 양국의 최대 이슈는 대선이다. 어떤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는가.
▲역사는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발전하고 느리더라도 진화한다고 믿는다. 또 잘못된 것은 반드시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다만 향수에 젖어서 또는 불쌍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쌍하다면 차라리 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도와줄지언정 표를 줘서는 안 될 것이다.
-탐사보도 언론인으로서,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평가도 궁금하다.
▲한국은 미국보다 언론의 영향력이 큰 나라다. 미국은 언론에서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는 일이 많지만 한국은 언론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를 시정하려는 시늉이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언론의 비중이 큰데 언론인 개개인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
“미 의회 보고서에 깜짝 놀랄 증거가…”
-박정희 정권 당시 대미로비를 취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평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에 관심이 많았다. 김 전 부장의 미국 내 행적을 보다 자세하게 알기 위해 대미로비에 관한 청문회 보고서를 찾기 시작했고 이를 국내 출간된 책과 대조해 보니 3분의 1 정도가 실리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이후 한국의 대미로비를 밝히기 위해 프레이저 청문회뿐 아니라 한국의 중정활동, 정치자금, 인권문제를 다룬 청문회까지 모두 살펴보게 됐다.
-이번에 출간된 책에는 방대한 양의 미국 청문회 자료와 비밀 메모가 수록됐는데 그 양과 기간이 어느 정도였나?
▲프레이저 청문회는 종합보고서 1권에 부록 2권, 부속책자 8권 등 모두 11권이 발간됐다. 대부분 200~700페이지 정도지만 일부 부속책자는 1000페이지가 넘어가기도 했다. 상하원 청문회 부속책자는 4권 역시 각각 10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이 밖에도 한국문제를 다룬 미 의회 보고서는 매우 많았는데 수록된 증거를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약 2년 정도에 걸쳐 자료를 수집했고 집중적으로 검토한 시간은 10개월 정도다.
-미국을 향한 로비 활동은 필수불가결한 활동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의 대미로비에 관한 칭찬할 점과 비판할 점이 꼽자면 무엇인가?
▲미국에서 로비하지 않는 국가는 단 한 나라도 없다.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1978년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 한국이 미국에 로비하게 된 동기를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은 우리가 도저히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유일한 절대적 존재였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 미국으로부터 좌익성향으로 오해를 받았지만 케네디 대통령에게 월남파병을 제의하면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받게 되고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3선 개헌 등 독재자의 길을 걸으면서 미 의회로부터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는 미국의 권력이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에서 의회로 옮겨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의 의원매수의혹이 불거졌을 때 미 의회가 더욱 발끈했던 것이다. 불법 대미로비가 노출된 것은 로비스트들의 지나친 행동도 문제였지만 행정부 인사와 민간인 로비스트 간 시기와 질투, 미국에 정착하는 방편으로 망명을 택했던 일부 외교관 등의 폭로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현재 한미 양국의 최대 이슈는 대선이다. 어떤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는가.
▲역사는 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발전하고 느리더라도 진화한다고 믿는다. 또 잘못된 것은 반드시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다만 향수에 젖어서 또는 불쌍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불쌍하다면 차라리 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도와줄지언정 표를 줘서는 안 될 것이다.
-탐사보도 언론인으로서, 한국의 언론 상황에 대한 평가도 궁금하다.
▲한국은 미국보다 언론의 영향력이 큰 나라다. 미국은 언론에서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는 일이 많지만 한국은 언론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면 이를 시정하려는 시늉이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언론의 비중이 큰데 언론인 개개인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