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의수 2만 5851건 ‘역대 최고’ 반면 처리율 36% ‘역대 최저’…“22대 국회 정쟁 더 심해질 것”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총 2만 5851건이다. 이 중 9455건이 처리됐다. 역대 국회 중 가장 많은 법안이 발의됐지만 처리율은 36.6%에 불과했다. 20대 국회(37.9%), 19대 국회(45.0%)보다도 낮다. 특히 법사위에 계류된 법안만 1696개다. 여야가 공감대를 이뤄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전체 회의만 열리면 통과됐을 법안들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다.
양육 의무를 다하지 못한 친부모가 자녀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가수 구하라 씨가 2019년 사망한 후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친모가 갑자기 나타나 유산을 받아 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적 공분이 일자 추진된 법안이다. 5월 7일 구하라법은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다. 2020년 6월 2일 법안이 발의된 지 1436일 만이다. 구하라법은 20대 국회에서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된 바 있다. 하지만 법사위 전체 회의가 열리지 않으면서 21대 국회에서도 빛을 보지 못했다.
변호사 광고 규제 기준을 대한변호사협회가 아닌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는 로톡법(변호사법 개정안), 세종시에 지방법원과 행정법원을 만들도록 한 세종법원법(법원설치법 개정안), 법관 370명을 순차적으로 증원하는 판사 정원법 개정안 등도 여야 합의로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지만 21대 국회 처리가 무산됐다.
법사위 민주당 간사인 소병철 의원은 5월 26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여야 이견이 없고 통과가 시급한 중요한 법들도 있다. 최소한 심사가 마무리되어 기다리는 법안들은 법사위 전체 회의를 열어 단 10건이라도 처리해야 한다”며 “‘구하라법’은 20대 국회에선 폐기됐고 21대 국회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뤘다”고 했다. 소 의원은 법사위 개회 요구는 ‘채 해병 특검법’과 무관하고, 충분히 분리해서 처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법사위 문턱도 밟지 못하고 상임위에서 폐기된 민생 법안도 수두룩하다. 육아 휴직 기간 연장과 난임 치료 휴가를 확대하는 내용의 모성보호 3법(근로기준법·남녀고용법·고용보험법 개정안)은 환경노동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저출산 위기 극복을 위한 법안 중 하나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최대 쟁점 법안인 사용후핵연료 처분 시설 부지 선정과 설치 근거를 마련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특별법도 마찬가지다. 오는 2030년부터 국내 원자력발전소 내 임시저장 시설의 포화 상태가 예상되면서 추진된 법안이다.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를 연장하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기획재정위에 묶여 있다.
거대 양당의 정쟁으로 인해 앞서 언급했던 법안들이 무더기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2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은 과반 의석을 앞세워 단독 입법을 이어갔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으로 맞서면서 강대강 대치 구도가 이어졌다. 민주당은 5월 28일 마지막 국회 본회의에서도 5개 법안을 국민의힘이 불참한 가운데 단독 처리했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세월호피해지원특별법을 제외한 4개 쟁점 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5개 법안은 △참사 피해자의 의료비 지원 기한을 5년 연장하는 내용의 4·16세월호참사피해구제지원특별법 개정안 △전세사기 피해자를 ‘선구제 후회수’ 방식으로 지원하는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특별법이 있는 4·19나 5·18을 제외한 민주화운동 희생자와 가족을 유공자로 예우하는 민주유공자법 제정안 △농어업인 대표조직 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농어업회의소법 제정안 △한우 농가를 지원하는 ‘지속가능한 한우산업을 위한 지원법 제정안’이다.
5월 29일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민주당이 단독 처리한 법안은) 충분한 법적 검토와 사회적 협의도 여야 논의도 없는 3무(無) 법안”이라며 “거대 야당의 일방 독주가 없다면 재의요구권 행사도 없다. 재의요구권 행사를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여야 정쟁으로 주요 민생 법안이 무더기 폐기됐다는 지적에 대해선 “민주당 때문에 각종 상임위, 본회의가 정상 진행되지 못했다. 그 책임은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오롯이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은 당 건의에 따라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이다. 5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덕수 총리 주재로 열리는 임시 국무회의에서 세월호피해지원법 개정안을 심의·의결하기로 결정했다. 28일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한 나머지 4개 법안은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민주당은 민생 법안 자동 폐기 책임을 국민의힘에 돌렸다. 22대 국회 개원 즉시 ‘채 해병 특검법’ ‘전국민 민생회복지원금’ 등을 재추진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5월 29일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 본청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오랜 시간 법안 통과를 기다려온 분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어 4개 법안만이라도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며 “계속되는 거부권 행사는 정권 몰락만 앞당길 뿐”이라고 말했다.
여야의 극한 대립 관계가 22대 국회에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면서 민생 입법 과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과거엔 ‘민생 국회’로 임기를 마무리하는 구색을 맞추고자 노력했는데, 21대 국회는 채 해병 특검법 둘러싼 정쟁을 하다 보니 될 일도 안 됐다”며 “22대 국회에서도 ‘비토크라시(상대 정파의 정책과 주장을 모조리 거부하는 극단적인 파당 정치)’가 작동할 것 같다. 거대 야당은 입법 독주를 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민주당은 탄핵 명분을 만들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여야 관계는 정쟁으로 악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22대 국회 인적 구성을 보면, 정쟁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며 “21대 국회의원들이 양식 있는 사람들이구나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