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권센터 “꾀병 취급해 벌어진 참사” 의혹 제기…육군 “군기훈련 규정·절차 문제점 식별됐다”
#8년 8개월 만에 수류탄 폭발 사망사고
5월 21일 오전 9시 50분쯤 충남에 위치한 육군 32사단에서 훈련 중 수류탄이 터져 훈련병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간부 1명과 병사 1명이 부상을 입었다. 부대는 이들을 신속히 국군대전병원으로 긴급 후송했으나 A 훈련병은 결국 사망했다. 간부는 응급치료 끝에 현재는 의식이 있는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병대대에서 수류탄 폭발사고로 사망자가 나온 것은 2015년 9월 이후 8년 8개월 만이다. 8년여 전 사고로 군 당국은 실제 수류탄을 이용한 훈련을 중단하고, 폭발이 없는 연습용 수류탄으로 훈련을 진행해 왔다. 그러다 2019년 1월 1일부터 지휘관 재량과 판단에 따라 실제 수류탄 훈련을 재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사고는 실제 훈련이 재개된 지 5년 4개월여 만에 발생한 첫 사고다.
육군은 A 훈련병이 안전핀을 뽑은 다음 수류탄을 던지지 않고 손에 그대로 들고 있자 이를 지켜보던 교관이 달려가 제지하는 과정에서 수류탄이 그대로 폭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A 훈련병의 어머니는 군 위문편지 홈페이지 더캠프에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방의 의무를 다하려 입대한 우리 아들이 왜 이런 위험에 노출되었고 사고로 이어졌는지 그 순간 얼마나 두려웠을지…”라며 아들을 잃은 심경을 전했다. 육군 관계자는 “사망 장병과 가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전한다”며 “민간경찰과 함께 정확한 사고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열사병 사망 훈련병, 쓰러지기 전 완전군장 팔굽혀펴기
이틀 뒤인 23일 또 다른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이날 오후 5시 20분쯤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12사단에서 군기훈련을 받던 훈련병 6명 중 1명이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이날 오후 5시 기준 인제군의 기온은 27.4℃였다. 쓰러진 B 훈련병은 민간병원으로 응급 후송돼 치료 받았으나 상태가 악화해 25일 오후 사망했다. 군기훈련이란 지휘관이 군기 확립을 위해 규정과 절차에 따라 장병들에게 지시하는 체력단련과 정신수양 등을 말한다. 지휘관 지적사항 등이 있을 때 시행되며 ‘얼차려’라고도 불린다.
사망한 B 훈련병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을 도는 군기훈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군기훈련 규정에 따르면 완전군장 상태에선 걷기만 시킬 수 있지만, 구보까지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훈련병들이 연병장에서 완전군장 구보를 하는 현장에 군기훈련을 지시한 여성 중대장 C 대위가 부중대장 D 중위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사망한 훈련병은 쓰러지기 전에 완전군장 팔굽혀펴기도 지시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군기훈련 규정에 따르면 팔굽혀펴기는 맨몸인 상태로만 지시할 수 있다.
군 당국은 군기훈련을 지시한 C 대위 등 간부 2명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와 직권남용가혹행위 혐의를 수사해 달라는 취지로 사건을 28일 강원경찰청으로 넘겼다. 경찰은 B 훈련병이 속한 부대를 방문해 당시 상황이 담긴 연병장 CC(폐쇄회로)TV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CCTV에는 숨진 훈련병이 군장을 메고 연병장을 도는 등 얼차려 장면이 담겼지만, 사각지대가 있어 쓰러지는 장면이 명확히 찍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B 훈련병과 함께 얼차려를 받았던 동료 5명에 대한 핵심 참고인 조사도 벌였다. 이들이 군기훈련을 받게 된 이유와 숨진 훈련병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물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경찰은 “현재 입건을 논할 단계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향후 B 훈련병 사망 사건은 부검 결과와 사건 당일 진행한 현장 감식 내용 등을 토대로 조사가 이뤄질 방침이다. B 훈련병의 유가족은 군이 아닌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요청했다. 부검 결과는 한 달 뒤쯤 나올 예정이다.
육군은 사망한 B 훈련병의 순직을 결정하고 일병으로 추서했다. 육군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께도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진심으로 전한다. 유가족의 입장에서 필요한 제반사항을 성심을 다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30일 오전에는 B 훈련병의 고향인 전남 나주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조우제 육군 12사단장을 비롯한 군 관계자와 유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군 신병 보호 대책에 쏠리는 관심
연이은 훈련병 사망 사고에 누리꾼들은 애도를 보내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모든 군인 사망 소식이 안타깝지만 훈련병이라 더욱 비참한 것 같다” “자식이 군대에서 비명횡사할 수 있다는 현실을 보면 ‘헬리콥터맘(자녀를 과보호하는 엄마)’이 이해가 된다” “누군가의 귀한 자식들일 텐데 안타깝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군이 B 훈련병의 이상징후를 파악하고도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는 제보도 나왔다. 군인권센터는 27일 “B 훈련병의 안색과 건강 상태가 안 좋아 보이자 같이 얼차려를 받던 훈련병들이 현장에 있던 집행간부에게 이를 보고했는데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고 계속 얼차려를 집행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제보 내용대로라면 지휘관이 B 훈련병의 건강이 악화된 상태를 인지하고도 꾀병 취급을 하고 무시하다가 발생한 참사”라고 지적했다.
B 훈련병은 횡문근융해증으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횡문근융해증은 무리한 운동, 과도한 체온 상승 등으로 근육이 손상돼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이다. 이에 대해 육군 관계자는 “육군은 이번 사안의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한 가운데 민간 경찰과 함께 협조해 조사를 진행했고, 조사 과정에서 군기훈련 간에 규정과 절차에서 문제점이 식별됐다”며 “구체적인 상황은 (군 당국이) 민간경찰과 조사 중이어서 말씀드리기가 제한된다”고 밝혔다.
지방 병원의 열악한 의료 상황이 B 훈련병의 골든타임을 앗아갔다는 지적도 나온다. B 훈련병은 이송 과정에서 40℃가 넘는 고온에 이상 호흡 증세에 신부전까지 겹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상급병원이었던 속초의료원은 신장투석기가 없어 B 훈련병의 치료가 불가능했다. B 훈련병은 상급종합병원인 강릉아산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숨졌다. 이에 대해 육군 관계자는 “이송 과정에 대한 사실 관계 역시 경찰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28일 오후 B 훈련병의 빈소가 마련된 전남 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을 했다. 박 참모총장은 김진익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등과 함께 유족을 만나 대화한 뒤 1시간 20여 분 만에 빈소를 나왔다. 박 참모총장은 ‘인권센터에서 가혹행위로 규정한 것에 대해 동의하느냐’ ‘유족에게 할 말이 없느냐’ 등 기자들의 질문에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고 육군버스에 올라 상경했다.
정치권에서도 두 훈련병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야권에서는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육군 훈련병들의 잇단 죽음을 살펴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역시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시는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치가 할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군 당국의 신병 보호 대책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육군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통화에서 “모든 부대를 대상으로 신병 교육훈련 체계 전반에 대해 정밀 점검을 진행하고 있고, 필요한 후속 조치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안수 참모총장은 28일 긴급 주요지휘관회의(VTC)에서 신병교육훈련 시 수준별·단계별로 훈련 강도를 적용하고, 훈련병 건강 및 기상을 고려해 탄력적으로 부대 운영할 것을 당부했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