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장영양제·소아청소년 천식치료제 수급난 심각…돈 안 되는 약 공급 축소? 필수의약품 생산 강제 요구도
김 씨는 “서울 대형병원에서 처방받아 먹는 경장영양제 ‘하모닐란’과 ‘엔커버’ 수입에 문제가 생겨 몇 달 동안 구입이 어려웠던 일이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어 미리 쟁여두는 습관이 생겼다”며 “그 사이 (영양제) 유효기간이 지나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먹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경장영양제 말고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사람에게 품절은 곧 생명이 위협받는 일”이라고 토로했다.
뇌전증을 동반한 최중증장애인 문 아무개 씨의 활동지원사는 지난 24일 정부서울청사 본관 앞에서 열린 ‘하모닐란‧엔커버 등 경장영양제 품절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문 씨는 하모닐란과 엔커버를 병원에서 처방받아 복용 중인데 올해 초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더니 품절이라고 들어 엄청 당황하고 놀랐다”며 “당장 먹어야 하는데 인근 약국을 한 시간 동안 찾아다니고 전화를 돌려 간신히 구입했던 생각이 난다. 다행히 재고가 있어 (위기를) 넘겼다”고 말했다.
여전히 일부 의약품은 품절 사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증 질환을 앓는 사람이나 장애인, 영유아 등에 사용되는 의약품 품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 환자 당사자나 보호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품절이 잦은 수입 전문의약품으로는 JW중외제약 ‘엔커버액’, 영진약품 ‘하모닐란액’ 등이 꼽힌다. 두 제품은 모두 비강튜브나 위‧장루 등을 통해 영양을 공급하는 식사대용 경장영양제로, 중증장애인이나 중증질환자에게 사용된다. 두 의약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허가변경이나 국내 재고분 소진 등 이유로 수년째 불규칙한 수급을 반복하고 있다.
소아약 품절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 6월 대한아동병원협회가 44개 아동병원을 대상으로 필수의약품 수급 상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뇌전증 발작 억제 유지약 △터너증후군 치료제 △성조숙증 필수 진단 시약 △성조숙증 치료주사약 △소아청소년 천식 치료제 △항생제 △독감 치료제 등 141개 필수 의약품이 짧게는 2주, 길게는 1년 이상 수시 품절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아동병원협회에 따르면 이달 기준 혈액제제 면역글로불린과 천식용 흡입형 치료제 공급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다. 면역글로불린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과 싸워 우리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다.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헌혈로 공급받은 혈장으로 만들어지는데 자가면역질환, 가와사키병, 수정된 배아의 착상과 임신 유지 등에 사용된다. 흡입형 치료제는 호흡기로 환자가 약물을 들이마시는 형태의 치료제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장은 “면역글로불린은 현재 생산량 부족 때문에 대학병원 중심으로 공급되고 있으며 가와사키 치료를 할 수 있는 아동병원은 약이 부족해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천식용) 흡입치료제 공급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으로 대체 치료법이 있긴 하지만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천식용 흡입치료제는 실제로 영유아가 천식이나 폐렴에 걸렸을 때 자주 처방되는데 처방을 받고도 약국에서 구하지 못해 구입 가능한 약국을 문의하는 글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중요 의약품 품절이 반복되는 이유로 의약계 관계자들은 수익성에 휘둘리는 생산량 요인을 주목한다. 제약사들이 수요가 적거나 팔아도 수익이 썩 나지 않는 의약품 생산은 줄이거나 중단하고, 수요가 많은 의약품 생산에 집중하면서 생기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글로벌 대형 이슈로 의약품 원료 공급에 차질이 생기거나 유통상 문제가 발생해 품절 사태를 키우기도 한다.
이동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사무국장은 “대중적인 약품은 제약회사 입장에서 이익이 나기 때문에 공급이 좀 더 원활한 편이지만 중증질환이나 입원환자 등에 쓰이는 약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며 “생산할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고 제약회사는 돈이 되는 약에 우선순위를 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약품 공급이 시장 논리에 휘둘리는 상황에서 보건복지부‧식약처가 (조정)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빚어지는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제약사 입장에서 보면 의약품 약가를 지속적으로 인하하는 정책이 품절 사태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진단도 있다. 제조원가가 지속 상승하는데 약가가 하락하면 수익성이 악화돼 제약사가 공급을 포기하도록 만든다는 주장이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장은 “근본적으로 약가 인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약회사는 채산성 문제가 해결 안 돼 공급이 계속 원활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며 “특히 소아청소년과에서 많이 처방되는 약들은 ‘규모의 경제’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제약회사 입장에선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3월부터 식약처와 대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의약품 제조·유통협회 등으로 구성된 ‘의약품 수급불안정 대응 민관협의체’를 운영하고, 균등 분배나 약가 인상 등의 조치를 시행했지만 수급 불안정 문제를 해결해내진 못했다.
시민사회에선 적어도 영유아‧청소년, 중증환자 등이 사용하는 필수 의약품은 국가가 나서서 생산을 의무화하는 등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온다. 양영실 건강세상네트워크 활동가는 지난 24일 ‘경장영앙제 문제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낮은 채산성으로 공급이 불안정한 의약품에 대해 정부가 적극 개입해 원활한 공급망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동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사무국장도 “제약회사는 매년 다른 제조업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훨씬 높은 이익률을 달성하는 편인데 이는 건강보험 재정을 통해 (국민들) 의약품 구입비용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필수의약품에 대해서는 이들 제약회사에 생산을 의무화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