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은 스포츠나 사회에서 약자로 인식되거나 우승경쟁에서 밀리는 이를 지칭하는 단어다. 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를 일컫기도 한다. 우리 영화 주인공은 홀어머니 아래서 지방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게임 회사의 비정규직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이다.
이제 서른 살쯤 되었지만 한 번도 자기가 속한 학교나, 집단에서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현재도 연애는커녕 변변한 회사에 채용된 적이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 비주류를 넘어 말 그대로 전형적인 언더독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을 자랑스러워 한 적이 없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이 자신을 한 번도 가치 있게 생각해주지 않았다. 그는 비정규직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가슴 아프게 회사를 퇴사하게 된다.
한번쯤은 그런 사회를 회사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화를 낼 수도 있었을 텐데 주인공은 그저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를 탓하며 열패감에 빠져 외롭고 쓸쓸하게 귀가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을 직면한다.
하늘의 절대자가 이 세상이 너무나 탐욕에 젖어있고, 너무나 불평등하고, 회복할 수 없는 극악의 사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세상이 더욱더 나빠져 회복 불능이 되기 전에 극약처방으로 세상을 리셋하기로 결정한다.
4000년 전 절대자는 인간사회가 너무나 아수라장이 되어 ‘노아의 방주’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고 시도했으나 4000년이 지난 현재는 노아를 통해 리셋한 사회보다 더 나빠졌고, 회복불능이라고 판단하여 인류를 완전히 재편하려고 결정한 것이다. 다만 노아의 방주는 단 한 가족만 살려서 다양성이 부족했다고 판단해 절대자들은 자신들이 제시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만 선별해서 구원하고 나머지 인간들은 다 없애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이 위기의 상황에서 능력 있고 권력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그저 제 살길만 찾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는데,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언더독의 대명사인 주인공만이 주변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협력하면서 위기를 극복했다.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를 구원하는 사람이 된다.
한 번도 자신에 대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단 한순간도 다른 사람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가장 하층의 언더독 청년이 그 누구보다도 휴머니즘에 입각해 다른 사람을 돕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지금 절망하고 외면받고 주목받지 못하는 전 세계의 젊은 언더독으로 인식되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 네가 인정받지 못하고, 주목받지 못하고, 가치 없다고 치부될지 모르겠지만 네가 가진 잠재력과 가능성은 어쩌면 세상을 구할지도 몰라. 지금은 네가 가진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본인이 본인을 가장 미워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마. 너는 충분히 가치 있고 멋진 사람이야.”
현재 절망에 빠져있는 친구들에게 응원을 하고 싶고 위로를 하고 싶고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 22대 국회가 시작됐다. 개원 초부터 여야가 서로의 힘자랑(?)을 하고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를 반복하며 서로를 비방하고 있다. 지금 절망에 빠져있고, 열패감에 젖어서 하루하루를 4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수많은 언더독들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 만드는 경쟁을 하지 않길 바란다.
출산율은 매해 최저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22대 국회는 심각하게 바라보길 바란다. 언더독들이 희망을 갖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릴 수 없는 사회라면 이 사회는 어쩌면 지속가능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끌어 주기 바란다.
“너희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일할게. 절망에 빠지지 마. 미래를 어둡게만 보지 마. 너희는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고 너희들의 잠재력과 가능성은 무한해. 우리는 이런 너희들을 도울게, 너희들을 위해서 일할게.”
22대 국회를 이끄는 분들로부터 이런 말들을 간절하게 듣고 싶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