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중·러 베이징 공동성명 정면 배치되는 합의…한반도에 우크라이나 전쟁 불똥 튈 가능성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가운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다. 푸틴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났다. 러시아 정상이 북한을 방문한 건 24년 만이다.
두 정상이 만난 뒤 사실상 ‘군사 동맹’에 가까운 합의가 이뤄졌다. 이른바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다. 1961년 옛 소련과 북한이 약속했던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부활했다는 평가다. 한쪽이 침공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군사 지원이 이뤄진다는 합의 내용이 담겨졌다.
중국 당국은 계산이 복잡해졌다. 이른바 ‘북·중·러’의 사회주의 진영 삼각관계에서 북한과 러시아가 ‘국방’이라는 키워드로 뭉친 까닭이다. 북한-러시아 밀월은 미국의 동아시아 견제 수위를 높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중국이 된서리를 맞는 형국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 싱크탱크 스팀슨센터 중국 전문가 원쑨은 미국 현지 북한 전문 사이트 ‘38노스’를 통해 “중국이 두 나라(러시아와 북한)에 대한 독점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었다”면서 “중국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그런 상황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과 러시아가 체결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과 관련해 원쑨은 “중국과 북한이 1961년부터 상호 방위 조약을 유지해온 점을 감안하면, 북한과 러시아의 조약으로 인해 중국이 뜻에 반하는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생겼다”고 바라봤다. 원쑨은 “이번 조약으로 중국이 궁지에 몰리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한 심기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5월 중·러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정치, 외교적 수단이 한반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출구”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 한 달 만에 ‘군사적 수단’에 합의한 북·러 정상을 두고 중국 당국은 침묵을 유지했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러 정상회담과 관련해 “논평하지 않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면서 우회적으로 중국 당국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잇따른다.
오히려 미국 당국자가 중국 입장을 대변하는 상황이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소통보좌관은 6월 20일 온라인 브리핑에서 북·러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과 관련해 “당연히 우려 사안”이라면서 “한반도뿐 아니라 인도태평양 평화와 안정을 신경 쓴다면 누구에게든 우려되는 사안”이라고 밝혔다.
커비 보좌관은 “중국도 우리 우려를 공유할 것이라고 본다”면서 “이번 협정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5월 베이징에서 발표한 공동성명과 정면 배치된다”고 했다.
한 중국 소식통은 “중국은 북한이 군사 및 국방 분야에서 과감한 행보를 펼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면서 “북한이 긴장감을 조성할수록 한미일 공조가 강화하고, 중국 당국 심기를 건드릴 만한 실효적 조치가 이어지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이 ICBM 시험발사 및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한국에 사드가 배치됐다”면서 “사드 배치에 대한 거부반응은 북한보다 중국에서 더 심했다”고 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핵개발 등으로 국제 정세에서 ‘악역’ 이미지를 구축한 러시아와 북한이 손을 잡으면서, 우호국인 중국 당국 입장도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면서 “중국 당국이 그간 ‘유럽은 러시아, 아시아는 중국’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담당구역’ 관련 불문율이 깨졌다고 느낄 여지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중국 소식통은 “대북제재 국면에서 북한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경제적 채널은 사실상 중국으로 국한돼 있었다”면서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의 협력 체계 범위가 넓어진다면, 북한에서 ‘중국 의존도’가 낮아질 수 있다”고 봤다. 그는 “북한과 러시아 협력 관계 범위가 넓어질수록 중국과 북한이 비공식으로 이어오고 있는 경제적 결속력이 낮아질 수 있다”면서 “중국 당국 딜레마가 점점 커질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한 대북 전문가는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군사동맹이 사실상 부활한 것을 두고 “북한이 든든한 백을 얻으면서, 북한을 건드리면 다른 화약고가 폭발하는 새로운 외교 안전망 구조를 구축했다”고 바라봤다. 소식통은 “북한과 러시아가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맺으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 정세와 연결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와 전혀 별개인 ‘국제 이슈’로만 여겨졌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번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정세와 한몸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우크라이나에 대한 한국 측 군사 지원이 이뤄지면 러시아도 한반도 정세에 적극 개입할 여지가 생긴 셈이다. 북한 입장에선 세계적인 이슈를 체제 방어에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러 정상회담 이후 우크라이나 관련 이슈를 둘러싼 외교 공방전이 치열해졌다. 국제사회에선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군이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인 도네츠크 등에 파병할 가능성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매슈 밀러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러시아와 북한의 협력 형태가 어떤 것이든 그것이 러시아에 점령된 우크라이나 영토 내 활동과 관련될 경우엔 우리가 반대할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6월 26일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한다면, 한·러 관계는 치명적인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면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대화 대신 대결의 길을 선택한 까닭에 한반도 상황이 위험한 경계선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외교당국은 이도훈 주러시아 한국대사를 외무부 청사로 불러 한국 정부의 대립적 정책을 재검토하라고 했다.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선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반도 정세에 급변을 가져올 수 있는 트리거로 작용할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한 안보 전문가는 “북·러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군사협력 관계가 부활했고, 이는 가벼운 사안이 아니”라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는 수많은 외교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데, 여기서 한반도 관계국이 무엇 하나를 잘못 건드리는 순간 그 불씨가 한반도로 번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