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는 10년여 전부터 촬영장에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준비하지 않고 있다. 그건 주요 스태프나 주연배우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촬영에 참여하는 스태프와 배우들 누구나 자유롭게 의자에 앉게 하기 위함이다.
오래 전 영화를 촬영할 때 한 배우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전용 의자를 사양했다. 이유를 묻자 그 배우는 이렇게 말했다.
“제 이름이 새겨진 의자엔 후배 배우나 신인들이 편하게 앉기가 힘들 겁니다. 그래서 후배들이나 피곤한 사람들이 편하게 앉으려면 이름이 없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난 그 후로 촬영장에 한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준비하지 않았고, 준비한 의자에 그냥 아무나 편하게 앉도록 하고 있다.
요즘 영화 관련 투자를 하는 회사들은 ‘부장님, 팀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그냥 이름에 ‘님’자를 붙인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서로에게 ‘OO님’이라고 부르면서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직급을 생략했다고 한다.
우리 큰딸보다 어린 친구가 이번 영화 주연으로 참여했다. 그 친구와 영화를 함께하기로 하고 여러 번 만나서 시나리오에 대한 해석, 인물에 대한 견해 등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는지를 점검하고 논의했다.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같이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배우가 “이번 영화가 아주 색다르고 인상적인 작업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무엇이 가장 색다르고 인상적이냐”고 물어봤다. 배우는 “물론 작품 자체도 새롭고 캐릭터도 독특하고 매력적”이라면서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대표, 감독 등 나이 많은 관계자와 수십 번 만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놓지 않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은 첫 만남에서 ‘내가 말 좀 편하게 해도 되지’라며 말을 놓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감독님도 대표님도 자신에게 존대를 하며 작품을 논의하는 게 아주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이게 현재 2024년 대한민국의 영화, 드라마 산업의 현주소다.
얼마 전 한 유력 정치인이 다른 정치인에게 “주군에게 대들다가 폐세자가 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진영의 고위 정치인은 자신의 당대표를 향해 “우리 당의 아버지이자 큰어른”이라고 칭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2024년 현재 정치는 마치 조선시대로 회귀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사건의 가장 상징적인 워딩은 ‘격노’다. 책임 있는 분이 격노를 했기 때문에 밑의 사람들은 그 격노의 의미를 파악하고 대처하느라고 이 문제가 불거졌다고 주장하는 언론 보도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며칠 전 국회에서는 위원장이라는 분이 “앞으로 대들지 말라, 그리고 회의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퇴장시키겠다”고 말한 뒤 실제로 증인(참고인)을 퇴장시켰다. 퇴장하는 증인을 향해 한 유력 정치인은 “나가서 한 발 들고, 두 손 들고 있으라”고 조롱하는 듯한 언사를 자연스럽게 했다.
민간 영역에서는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높지 않든 서로가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상호존중이 생산성을 높이고, 효율성을 높이며 상대방에 대한 예우라는 걸 직시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정치권은 점점 더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권위주의적 행태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해지고 있다는 점이 개탄스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왜 영화인들이 개인 전용 의자를 없애고, 회사원들이 호칭에 직급을 생략하는지를 정치인들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왜 우리가 어린 동료에게 반말하지 않고 존중하는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봤으면 한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