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법 다변화 속 처벌 수위 높아지는 분위기…미국 ‘경제스파이법’ 제정해 간첩죄 수준 엄중 처벌도
#협력업체 활용하고 중국 경쟁사와 공모하고
올해 상반기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적발한 산업기술의 해외유출 사례는(12건) 지난해 상반기(8건)보다 50% 늘었다. 반도체 기술이 4건으로 가장 많았고 디스플레이(3건), 전기·전자(2건), 조선(1건) 등이 뒤를 이었다. 기술 유출국은 중국(10건)이 가장 많았다. 미국과 이란에도 1건씩 유출됐다. 같은 기간 국가핵심기술이 빠져나간 사례는 6건이었다. 국가핵심기술은 해외로 유출되면 국가안전 보장과 국민경제 발전에 중대한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이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례는 늘고 있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의 ‘2003~2023년 산업기술 해외 유출 적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적발된 기술 유출 건수는 총 552건이었다.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례 중 국가핵심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3~2007년 2.52%(3건)에서 2008~2012년 8.95%(17건), 2013~2017년 14.39%(20건), 2018~2022년 35.49%(33건)로 증가하는 추세다.
대법원 판결문 인터넷 열람 사이트 등을 통해 국가핵심기술이 해외에 유출된 사건을 분석한 결과 유출 수법은 다양했다. LG디스플레이에 입사해 중국 주재원 등을 지낸 A 씨는 2021년경 회사 내부 시스템에 접속해 디스플레이 발광 기술인 아몰레드(AMOLED) 패널 설계·공정·제조 기술 자료를 열람하며 1065장의 사진을 촬영해 보관했다. 중국 경쟁사에 이직할 목적으로 기술을 유출했다.
협력업체를 활용해 기술을 유출한 사례도 있었다.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 전직 연구원 B 씨는 2019년 1차 협력업체 직원 등을 통해 세메스가 최초로 개발한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 설계 도면을 건네받았다. 이를 통해 세메스 제품과 동일한 사양의 반도체 세정 장비를 제작해 중국 업체에 팔아넘겼다.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는 30나노(nm, 10억 분의 1m) 이하급 D램과 낸드플래시 등을 제작하는 데 쓰이는 장비다.
중국 업체가 유출에 가담하기도 했다. 2020년 6월 중국 배터리 기업의 한국법인 에스볼트 코리아는 서울에 위장 연구소를 세워 삼성SDI와 SK온(당시 SK이노베이션) 직원들에게 막대한 연봉을 조건으로 이직을 제안했다. 이 직원들은 회사에 재직하며 촬영한 전기차 관련 국가핵심기술을 이직 후 에스볼트에 제공한 혐의를 받는다. 올해 1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안보수사대는 삼성SDI·SK온 전·현직 임직원 5명과 에스볼트코리아, 에스볼트 중국 본사 등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상 국가핵심기술을 해외로 유출하면 3년 이상 징역, 15억 원 이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감경 요소가 반영돼 실제 처벌 수위는 법정형보다 낮은 경우가 많았다. 대법원에서 A 씨는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1000만 원, B 씨는 징역 5년 형을 확정받았다. 반도체 회로 동작을 계산하는 소프트웨어(SPICE) 모델링 등 기술을 빼돌려 기소된 삼성전자 전직 연구원은 지난해 말 징역 1년 6개월과 벌금 1000만 원이 확정된 것으로 확인됐다.
올해 3월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국가핵심기술을 국외로 유출하는 범죄는 7월 1일 공소 제기되는 사건부터 감경 영역이면 2~5년, 기본 영역은 3~7년, 가중 영역이면 5~12년을 선고하도록 권고하는 양형 기준을 의결했다. 최대 징역 18년형까지 선고할 수 있다. 양형 기준은 판사가 선고 때 참고하는 가이드라인이다. 별도 양형 기준이 없었던 ‘국가핵심기술 등 국외 침해’ 조항을 신설한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국가핵심기술 유출 처벌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위기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행위자를 대리한 한 변호사는 “초임계 반도체 세정장비를 유출한 사건의 경우 올 초 피의자들 합계 징역 10년이 나왔다”며 “유출한 기술의 경중에 따라 판결에 차이는 있겠지만 유출 행위자들 입장에서는 우려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처벌 강화가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도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 발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7월 18일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핵심기술을 외국에서 사용하거나 사용될 것을 알면서도 유출하면 5년 이상 징역 또는 15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도록 법정형을 상향하는 내용이 담겼다. 위반행위로 인한 재산상의 이득액의 1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 15억 원을 초과하면 재산상 이득액의 2배 이상 10배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21대 국회에서 국가핵심기술을 해외에 유출하는 경우 벌금을 65억 원 이하로 상향 조정하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논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 안성진 성균관대 컴퓨터교육과 교수는 “경제 사범만큼 상당히 높은 수준의 과징금을 부과하면 국가핵심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고 밝혔다.
국가핵심기술 해외 유출 사건을 간첩죄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형법 98조 1항은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한다. ‘적국’을 ‘외국’으로 수정하자는 것이다. 적국으로 규정되는 북한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국가핵심기술 등 기밀을 유출해도 처벌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미국은 1996년 ‘경제스파이법(EEA)’을 제정해 기술 유출 범죄를 간첩죄 수준으로 엄중 처벌해왔다. 대만도 산업기술 유출 범죄에 간첩죄를 적용하고 있다. 기업소송 전문 한 변호사는 “우리나라도 해외 기술 유출 건에 대해서는 국정원이 초기 정보 수집이나 수사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간첩 정도로 보고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에 더해 처벌 수준을 높이려는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다만 처벌 수준을 높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디스플레이 업계 한 관계자는 “과학기술 분야 고경력자들이 퇴직한 후에도 사회에서 유의미한 일을 할 수 있는 퇴로를 잘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기술유출 소송 과정에서의 비용, 시간 부담이 상당하다. 국가핵심기술 유출 관련 소송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며 “적절한 처벌을 위해 객관적인 피해 금액 산정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산업기술 유출 전문법원 설치도 도움이 될 듯하다”고 밝혔다.
국가핵심기술 관리 체계를 강화하는 법안도 속속 나오고 있다. 지난 6월 19일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국가핵심기술 해당 여부에 대한 판정을 신청하도록 기관에 통보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한 회사 등 기관이 국가핵심기술 판정을 진행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구 의원과 안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에는 국가핵심기술 유출 사건이 발생하면 산업부 장관이 실태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