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쿠바 수교 논의 중 주 쿠바 참사관 망명…외교관들 탈북 러시, 군·보위부 등으로 옮겨 붙을 수도
리일규 주 쿠바 북한대사관 참사는 2023년 11월경 한국으로 망명했다. 최근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 보도를 통해 리 참사 탈북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리 참사는 평양외국어대학 출신 엘리트로 청소년기부터 쿠바에 거주한 이력이 있는 ‘쿠바통’으로 알려졌다.
리 참사는 2013년 파나마에 억류된 북한 선박 ‘청천강호’ 억류 문제를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정은 표창장’을 받은 이력이 있는 인사다. 북한과 쿠바 사이 외교관계 무게감을 고려해봤을 때 외교 일선에서 비중이 큰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리 참사가 주 쿠바 북한대사관 근무 중 마지막으로 맡았던 임무는 한국-쿠바 수교 저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이 2023년 5월부터 9월까지 쿠바 외교당국 고위 관계자와 비밀리에 수교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2024년 2월 14일 한국과 쿠바는 전격 수교했다. 쿠바와 단독 수교를 하고 있던 북한 입장에선 상당한 외교적 손실이 따른 사건이었다.
북한 고위급 간부들 사이에선 쿠바를 ‘배신자 국가’라고 칭하는 등 반발 기류가 상당했다고 한다. 한국과 쿠바 수교를 막지 못한 주 쿠바 북한대사관 외교관들에 대한 책임론도 불거진 것으로 전해진다. 마철수 주 쿠바 북한대사는 2024년 3월 해임돼 북한으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쿠바 수교가 물밑협상 단계에 있던 2023년 11월 리일규 주 쿠바 북한대사관 참사가 탈북을 감행했고, 리 참사 탈북 소식은 2024년 7월이 돼서야 세상에 공개됐다.
2016년 8월 탈북한 주 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출신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이 고위급 외교관 탈북 스타트를 끊었다. 2019년 7월엔 조성길 주 이탈리아 북한대사관 대사대리가 탈북했다. 2019년 9월엔 류현우 주 쿠웨이트 북한대사관 대사대리가 탈북했다. 조 대사대리와 류 대사대리 탈북 이후 4년 만에 고위급 외교관이 탈북해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은 탈북 이후 정치권에 데뷔해 국회 의정활동까지 했다. 여전히 탈북 엘리트 인사 ‘빅 마우스’로 꼽힌다. 조성길 전 이탈리아 대사대리는 모종의 이유로 탈북했고, 북한 내 유력 외교관 집안 출신인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류현우 주 쿠웨이트 대사대리는 ‘장인’이 북한 내 유력자 출신이어서 관심을 받았다. 음지에서 북한 외화벌이를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전일춘 전 실장이 류 대사대리 장인이다. 류 대사대리는 쿠웨이트에서 근무하던 중 김일성, 김정일이 그려진 선전유화를 분실한 사건을 계기로 탈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 참사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열악한 북한 외교관 처우 및 한계에 다다른 북한 내부 상황 등을 폭로했다. 북한 외교관을 직접 ‘넥타이 멘 꽃제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추가적인 북한 고위급 탈출이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북 소식통은 “외교관들의 탈북은 정례화될 정도로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외교관들은 북한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북한의 공식 업무를 대리하기 때문에 제3국 혹은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는 접근성이 북한 내부에 있는 인사들보다 훨씬 좋다”고 했다. 소식통은 “외국에서 느끼는 북한과 한국의 격차, 외교관 신분임에도 외국에서 실감할 수밖에 없는 빈곤 등 요소가 북한 외교관 탈북을 부추기고 있다”고 했다.
외교관 탈북러시는 그 자체로도 북한 당국에 큰 위협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외교관들이 연쇄적으로 한국 망명길에 오르는 상황이 또 다른 균열의 방아쇠를 당길 가능성도 뒤를 잇는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외교관들이 계속해서 탈북해 한국행을 선택하는 상황에 대해 북한 당국은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라면서 “외교관들의 탈북은 탈북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탈북을 하고자 하는 심리가 다른 분야로 옮겨 붙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내부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리일규 참사가 북한 외교관을 ‘넥타이 맨 꽃제비’라고 할 정도로 그들은 자력갱생을 통해 해외에서 생존전선을 구축해야 하는 인사들”이라면서 “엘리트로 분류되지만 정작 생활이 너무 곤궁한 이들”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외교 일선에 있는 외교관들의 탈출이 이어지면, 정말 실질적인 힘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다른 분야 엘리트들이 이탈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중국 등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북한 공관에서 유의미한 사건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면서 “외교 실무자뿐 아니라 진짜 실력자들이 탈출하기 시작하면 북한 내부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외교관들은 외국 현지에서 근무하다가 망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이들은 외교 일선에서 당의 지침을 이행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고 했다.
강 대표는 “지금까지 외교관 등에 국한돼 왔던 탈북러시 흐름이 조금씩 바뀔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면서 “군이나 보위부 등 중요 핵심 정보를 틀어쥔 인사들이 모종의 이유로 탈출을 결심하는 케이스가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태영호 전 국민의힘 의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탈북 외교관들의 ‘통일 역할론’을 강조했다. 태 전 의원은 “내가 한국에 온 뒤 조성길 이탈리아 대사대리, 류현우 쿠웨이트 대사대리가 왔다”면서 “앞으로도 북한 외교관들의 탈북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태 전 의원은 “북한 외교관 출신들이 모두 힘을 합쳐 통일운동을 열심히 해 자기 자식들을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보려는 북한 간부들과 주민들의 꿈을 꼭 실현해 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