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두 달 만에 7회, 너무 잦아 국민 관심 멀어져…토론 지원자 없어 초·재선 차출하고 야권에 요구하기도
필리버스터는 국회에서 다수당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법안이나 정책을 통과시키는 상황을 막기 위해 소수당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의사진행을 고의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박정희 정권이던 1973년 국회법 개정으로 사라졌다가 2012년 5월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면서 39년 만에 부활했다.
돌아온 필리버스터가 처음으로 시행된 것은 19대 국회 때였던 2016년 2월이었다.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테러방지법 의결을 추진하자 야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국민의당이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38명의 야당 의원들이 192시간 동안 본회의장 단상에 서서 테러방지법 도입의 부당함을 설명했다. 테러방지법 처리를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전국민적 관심을 모았다.
이후 2019년 12월 20대 국회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이 공직선거법(준연동형 비례대표제)과 공수처법(공수처 설치 및 운영)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실시했다. 이때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도 찬성 토론자로 참여해 반대 논리에 맞불을 놨다. 21대 국회에서는 국민의힘이 2020년 12월에 공수처법, 국정원법(대공수사권 경찰 이관), 남북관계발전법(대북 전단 금지)과 관련해, 2022년 4월은 이른바 ‘검수완박’을 위한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 처리에 반대해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22대 국회에서는 개원 두 달 만에 필리버스터가 7번 실시됐다. ‘채 해병 특검법’ ‘방송4법(방송통신위원회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 ‘전국민 25만 원 지원법’ ‘노란봉투법’ 등에 대해서다. 7번 필리버스터는 지난 8년 동안 8번에 육박하는 기록이다.
방송4법의 경우 법안 1건마다 필리버스터를 발동해 4건 법안이 모두 처리되기까지 5박 6일이 소요됐다. 민주당 등 야당은 압도적 의석을 확보한 만큼, 필리버스터 종결 요건인 24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토론을 종결시키고 법안을 의결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필리버스터 실시 24시간 뒤에는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로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료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계속된 필리버스터에 대해 ‘민주당의 입법폭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의힘이 민주당의 독단적 입법 추진에 진정성 있게 문제의식을 갖고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느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22대 국회에서 1호로 가동된 채 해병 특검법 필리버스터는 ‘필로우버스터’라는 비웃음을 받았다. 베개를 뜻하는 영어단어 필로우(pillow)와 버스터의 합성어다. 김민전 최수진 임이자 의원 등이 필리버스터 도중 본회의장에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누인 채 잠을 자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새벽에 의장석에 앉아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토론자 발언 내용보다 동료 의원들이 조는 의원을 깨우고,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가 딴짓을 하는 의원들에 ‘일시 퇴장’ 지침을 내렸다는 등의 해프닝이 더 관심을 모았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부활하고 처음 진행된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는 국민들이 중계를 찾아보는 등 전 국민적 관심을 모았다. 이번엔 두 달 사이 7번이나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다보니 국민들도 무뎌졌다. 노란봉투법과 전국민 25만 원 지원법의 경우 필리버스터를 했는지도 모르는 국민들이 많다. 민주당이 압도적 의석을 갖고 있어 필리버스터도 24시간만 지나면 강제 종료할 수 있다. 국민의힘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절실함보다 ‘대충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생각에 의무적으로 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나서는 의원들도 많지 않다.”
필리버스터에 반대 토론자로 나설 국민의힘 의원이 많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풀이된다. 야권 한 관계자는 “필리버스터를 앞두고 토론자로 나설 의원들 순번 명단이 나온다. 초기 명단 중 일부는 국민의힘 의원 2명에 민주당 의원 4명, 국민의힘 3명에 민주당 5명 등 민주당 의원들이 더 많이 신청한 명단이 등장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는 국민의힘이 신청했는데 정작 토론자로 지원한 의원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당 지도부가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차출해 내보내는 일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7번의 필리버스터에 국민의힘 의원은 반대토론자로 총 23명이 본회의장 단상에 올랐다. 이 중 초선 의원이 17명, 재선 4명으로 91%가 초·재선으로 채워졌다. 토론자로 나선 중진 의원은 4선 박대출 의원과 3선 신성범 의원 정도였다.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민주당에 맡기는 형국까지 연출됐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노란봉투법 필리버스터가 끝난 8월 4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민주당 당론법안인데 민주당 의원들의 찬성토론은 두 법(전국민 25만 원 지원법·노란봉투법) 합쳐 2시간밖에 안 됐다. 민생경제를 파괴할 법안들을 일방적으로 처리하면서 토론은 회피하는 무성의한 태도”라고 밝혔다. 민주당 의원들이 토론자로 나와 시간을 길게 끌어주지 않는다는 취지다.
민주당 한 인사는 “필리버스터의 본 취지는 소수당이 일방적 법안 통과의 의사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하는 것이다. 순번을 교차하며 다수당이 찬성토론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에 새누리당 의원들은 한 명도 안 나왔다. 국민의힘에서 계속 사실관계와 맞지 않는 주장을 하니,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민주당이 찬성토론을 하는 것뿐, 민주당은 발의해 빨리 법안 처리하고 싶은데 왜 무제한 토론으로 방해를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앞서 야권 관계자는 “토론자 순번 명단을 보면 처음에 국민의힘 민주당 의원 합쳐서 보통 6명이 올라왔다.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4시간씩 6명 의원이 토론하면 24시간이 지나 민주당이 종료시킬 거라 생각한 것 같다. 민주당이 토론자를 안 내거나, 24시간이 지나도 안 끝내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성의 없이 접근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국민들에 법안의 부당성을 설득할 수 있겠냐”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 7월 26일 방송4법 방송법 필리버스터 도중 24시간이 지났는데, 민주당이 곧바로 토론 종결을 신청하지 않았다. 민주당 전당대회 일정이 있어, 48시간 필리버스터를 진행한 뒤 종결시킬 계획이었던 것.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48시간 동안 이어질 필리버스터에는 미처 대응하지 못해 당혹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민주당은 재차 공지를 통해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사회를 거부해,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학영 부의장의 체력적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30시간 만에 필리버스터를 중단시켰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도 필리버스터에 회의감을 갖고 있고 의지가 없는데, 용산 대통령실에 여당도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요식행위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명분 쌓기용’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