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쥬·웨이션 브이 등 외국 국적 멤버로만 구성…생명력 지속 위해 한국과 단단한 고리 유지해야
요즘 가요계에서 심심치 않게 오가는 질문이다. K-팝은 ‘코리안 팝’(Korean pop)의 약자다. ‘한국의 노래’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통상 탄탄한 기획을 바탕으로 뚜렷한 콘셉트를 갖추고 오랜 트레이닝 끝에 데뷔한 다인조 그룹을 뜻한다. 최근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K-팝 그룹’은 대략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 이런 트레이닝 방식을 통해 배출된 그룹이면 인종·국적 등에 상관없이 모두 K-팝 그룹이라 볼 수 있을까. 여기부터 답변이 어려워진다.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이, 특정 국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K-팝 그룹이 늘면서 그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K-팝 시장의 맏형 격인 SM엔터테인먼트(SM엔터)는 최근 영국 엔터테인먼트 기업 문앤백(Moon&Back)과 손잡고 보이그룹 디어 앨리스를 론칭했다. 구성원 5명 모두 영국인이다. 이들은 영국 현지 오디션을 통해 발굴됐다. 이후 서울 성수동 SM 사옥에서 100일 동안 집중 트레이닝을 받았다. 이 과정은 영국 BBC원, BBC아이플레이어에서 6부작 TV 시리즈 ‘메이드 인 코리아: 더 케이팝 익스피리언스’로 공개된다.
디어 앨리스의 멤버 덱스터 그린우드는 8월 1일 런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SM엔터에서의 트레이닝은 저희 모두에게 엄청난 여정이었다. SM엔터 임직원과 한국 관계자들로부터 놀라운 지원을 받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굉장한 TV 프로그램과 저희 팀의 탄생이 가능할 수 있었다”며 K-팝 그룹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한국인 없는 K-팝 그룹’을 먼저 구상한 건 JYP엔터테인먼트(JYP엔터)다. JYP엔터는 일본 현지 오디션을 거쳐 선발한 이들로 걸그룹 니쥬를 데뷔시킨 데 이어 보이그룹인 넥스지를 내놨다. ‘니지 프로젝트’ 1, 2기의 결과물이다. 이외에도 중국인으로만 구성된 보이스토리도 공개했고, 한미 합작 그룹 비춰도 활동 중이다. 미국 내 오디션 A2K를 통해 결성된 비춰는 미국인 4명, 캐나다인 1명, 한국계 미국인 1명, 총 6명으로 구성됐다. 한국계 멤버가 있지만 국적 기준으로 보면 역시 한국인이 1명도 없는 셈이다.
이후 유력 가요기획사들이 앞다퉈 이 시장에 뛰어들었고다. 하이브 소속 걸그룹 캣츠아이, SM엔터 소속 웨이션 브이 등이 각각 미국,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K-팝 그룹의 ‘탈 한국’, ‘탈 아시아’ 시도는 기획형 아이돌이 첫 등장한 199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시작됐다. 유학생이나 교포 멤버를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였다. HOT의 토니 안, 젝스키스의 은지원과 강성훈, 신화 에릭, SES 유진 등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때 K-팝 그룹은 해외 진출을 목표로 삼진 않았다.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도 ‘오렌지족’ 문화를 반영, 영어를 잘하는 교포나 유학생에 대한 로망 이미지를 그룹 멤버에 투영시킨 셈이다.
이 시기가 지난 뒤 각 그룹은 아예 외국인을 주축 멤버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3세대 K-팝 그룹의 대표적 특징이다. 9인조 걸그룹 트와이스는 일본인 3명과 대만인 1명을 포함시켰고, 블랙핑크에는 태국인 리사가 투입됐다. 보이그룹 엑소에도 여러 중국인 멤버가 배치됐고 이후 데뷔한 보이그룹 NCT와 트레져, 걸그룹 에스파와 (여자)아이들, 아이브에서도 외국인 멤버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시기를 거친 뒤 이제는 디어 앨리스, 니쥬, 넥스지, 보이스토리, 웨이션 브이 등 아예 외국인만으로 구성된 K-팝 그룹이 등장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는 세계를 호령하는 K-팝 그룹들을 배출한 각 가요기획사에 대한 믿음이자 K-팝 트레이닝 문화에 대한 존중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출중한 외모와 실력을 갖춘 외국인들이 자국 데뷔가 아닌 K-팝 그룹의 일원이 되기 위해 기꺼이 한국으로 오고 있는 셈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외국인들의 지원 빈도가 크게 늘었다. 그 결과 Mnet ‘프로듀스 48’은 아예 한일 합작 걸그룹 아이즈원을 배출해 양국을 오가며 활동했고, Mnet ‘보이스 플래닛’을 통해 결성된 제로베이스원의 우승자이자 센터는 중국인인 장하오다. K-팝 시스템에 올라타기 위해 우수한 외국인 자원이 몰리고 있고, 외국의 시청자들도 이런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인 없는 K-팝 그룹의 성패를 속단할 수는 없다. 독특한 콘셉트로 화제를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니쥬의 경우 데뷔와 동시에 일본 활동에 몰두하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최근 상승세가 꺾였다는 평가가 적잖다. 이를 의식한 듯 시즌2를 통해 배출된 넥스지는 일본인 멤버가 주축이지만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먼저 닻을 올렸다. 여전히 한국인 멤버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데뷔해 인기를 쌓으며 해외로 진출한 K-팝 그룹이 ‘K-팝의 성골’로 평가받으며 그들을 좇는 외국 팬들의 수요가 높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K-팝 그룹’으로서 생명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단단한 고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