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주는 술·음료는 물론 사탕·초콜릿·액상담배도 주의해야…피해자도 공동 투약 피의자로 수사
지난 4월 3일 밤 10시 무렵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소재 한 호프집에서 50대 남성과 두 여성이 함께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두 여성이 함께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이 남성이 한 여성의 술잔에 흰색 가루를 탔다. 여성들이 돌아오자 남성이 건배를 권유해 가루를 탄 술을 모두 마시게 했다. 다행히 옆 테이블에서 연인과 데이트 중이던 20대 남성이 이를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해 확인해 보니 문제의 흰색 가루는 마약으로 밝혀졌다. 동석했던 여성은 즉석 만남으로 만난 사이였다. 옆 테이블 20대 남성의 눈썰미와 신고 정신으로 이 여성은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2023년 4월 인천시 동구의 한 음식점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60대 남성이 그날 처음 만난 여성의 복분자주 잔에 몰래 필로폰을 넣어 마시게 했다. 범행 목적은 성관계였다. 이미 같은 범죄로 두 차례 집행유예 처벌을 받은 전력이 있던 이 남성에게 법원은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2022년 7월 한 여성 프로골퍼가 동료 프로골퍼 A, 골프 수강생 3명 등과 함께 강남의 한 유흥주점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A는 술이 금방 깰 거라며 숙취 해소제를 한 알 건넸다. 술자리가 끝난 뒤 귀가한 여성 프로골퍼는 몸상태가 이상하다고 느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알고 보니 A가 건넨 것은 숙취해소제가 아닌 엑스터시였다.
맛과 냄새가 없는 마약류를 상대방 몰래 술에 타서 마시게 한 뒤 성폭행 등 추가 범행을 일으키는, 소위 ‘퐁당 마약(몰래뽕)’ 범행이다.
지난 3월 29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에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소재의 한 주유소에서 30대 주유소 직원이 휘발유를 자신의 몸과 주위에 뿌리고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이 출동해 발 빠르게 진화에 성공했지만 주유소 직원은 전신 2도 화상을 입었다. 알고 보니 그는 대마에 취해 있었다.
주요소 직원은 본인이 대마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과거 주요소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이 일을 그만둔 뒤에도 종종 주유소를 찾아와 함께 담배를 피곤 했는데 이날도 전직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최근에 나온 고급 액상 담배인데 정말 좋다”며 액상 전자담배를 권했는데 실제로는 액상 담배가 아닌 액상 대마였다. 주유소 직원은 갑작스러운 환각 증상을 겪다 방화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주위에서 마약을 구하기 쉬워지면서 주로 성폭행이 목적이던 퐁당 마약 사건이 다양한 목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심지어 지인을 마약에 중독되게 만든 뒤 자신이 확보한 마약을 비싼 가격에 되팔기 위한 사례까지 등장하고 있다. 또 ‘대치동 마약음료 사건’같이 몰래 마약을 투약하게 만든 뒤 협박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사례도 있다.
더 큰 문제는 관련 처벌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타인을 속여 몰래 마약을 투약하게 한 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처벌 규정이 없어 마약 구매 또는 소지 혐의 등으로만 처벌이 가능하다. 마약에 취하게 만든 뒤 성폭행을 한 경우라면 성폭행 혐의까지만 더해진다. 앞선 사례들도 모두 이렇게 처벌이 끝났다. 이미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아직 통과하진 못했다.
퐁당 마약 사건의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닌 공동 투약 피의자로 수사를 받아야 한다. 어렵게 고의 투약이 아님을 입증해야 마약 사범이 될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데 그 이후 중독 등의 2차 피해를 해결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타인이 주는 술이나 음료 등은 거부하는 것이 좋고, 지인이 주는 것일지라도 되도록 조심해야 한다. 액상담배 역시 액상대마일 가능성이 있다. 사탕이나 젤리, 초콜릿 등도 조심해야 한다. 대마가 합법인 국가에서 몰래 들여온 대마가 함유된 제품일 수 있다. 요즘에는 유명 브랜드 사탕이나 초콜릿 제품에 몰래 마약을 넣은 경우도 있고, 지난 봄 화제가 됐던 ‘이태원 초콜릿 주사’처럼 주사바늘로 초콜릿 등에 마약을 몰래 넣기도 한다.
퐁당 마약의 피해를 입은 경우 빠르게 신고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약 투약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우려 탓에 신고를 망설이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광주광역시 서구와 부산광역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마약류 피해노출 익명검사를 실시하고 있다.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돼 퐁당 마약 가해자를 가중 처벌하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게 되는 게 시급해 보인다.
퐁당 마약 피해자를 비롯한 마약 투약자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처벌보다 치료가 먼저라는 주장이다. 책 ‘나는 왜 마약 변호사를 하는가’(세이코리아)를 펴낸 안준형 법무법인 지혁 변호사는 “지금은 마약 중독자 하면 괴물같이 본다. 그런 시선이 마약 투약자에게 ‘내가 사실 마약 투약을 했다’고 말할 수 없게 하는 풍토”라며 “마약 투약을 했어도 괴물로 변하는 게 아니라 치료 과정을 통해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등 세계적 추세는 투약자는 치료하고, 유통업자는 처벌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처벌 일변도다. 안 변호사는 “미국에는 리햅(재활센터)이 흔한데 마약에 중독되면 처벌이 아니라 리햅에서 치료하고 사회로 복귀한다”며 “우리나라는 향방(마약사범만 모인 감방)에 있다 사회로 돌아오면 바로 며칠 뒤 마약에 다시 손대는 경우가 흔하다. 처벌보다 사회로 복귀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