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 원 빌렸는데 이자 2000만 원 눈덩이…돈 못 갚으면 주변 사람들 협박 ‘지옥 같은 나날’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더 많은 개인정보 요구
시작은 단돈 50만 원이었다. 급전이 필요했던 A 씨가 이용한 곳은 인터넷 대부중개 사이트였다.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지 5분 만에 대부 업체들로부터 ‘돈을 빌려주겠다’는 전화가 빗발쳤다. 자신을 김 실장이라고 소개한 한 대부업자는 50만 원을 빌려줄 테니 일주일 뒤에 80만 원으로 갚으라고 했다. 연 이율로 계산하면 3000%가 넘지만 A 씨는 월급만 받으면 바로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대출을 진행했다.
A 씨는 일주일 뒤에도 돈을 갚지 못 했다. 결국 불어난 이자만큼 돈을 빌려줄 또 다른 대부업체를 찾았다. 처음 돈을 빌려준 대부업자가 나서서 또 다른 업체를 소개해줬다. 그 사이 이자는 연장비, 연체비, 지각비 등을 명목으로 하루하루 눈덩이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몇 달 후 A 씨가 돈을 갚아야 할 곳은 1곳에서 30곳으로, 30만 원에 불과했던 이자는 2000만 원까지 불어났다.
현행법상 법정 최고 이율은 20%다. 얼마를 빌렸든 원금의 20%에 해당하는 연 이자만 지불하면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A 씨가 대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업체가 대출을 담보로 받아 간 지인들의 연락처 때문이었다.
실제로 대부업자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A 씨에게 많은 개인정보를 요구했다. 재직증명서와 주민등록등본은 물론 휴대폰에 저장된 지인들 연락처를 제출하라고 했다. 모든 것이 신용 확인을 위한 자연스러운 ‘절차’라고 했다. 심지어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 인증을 통해 A 씨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와 사진첩의 사진까지 모두 복사해갔다.
A 씨는 “가장 가깝게 지내는 지인이 누군지 알아야 하니 카카오톡 최근 대화 내역을 캡처해 보내라고 했다. 그날부터 매일 지옥 같은 하루가 시작됐다. 돈을 조금이라도 늦게 갚으면 지인들에게 연락이 갔다”고 말했다. A 씨가 돈을 갚지 못 했으니 가족과 친구가 대신 갚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법상 채권 추심자는 채무자 가족이나 지인에게 변제 독촉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채무자 빚을 대신 갚으라고 강요하는 것도 위법이다.
이에 대해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불법 대부업체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월급통장, 원천징수 영수증, 신분증 사진 같은 정보를 다 받아간다. 그리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지인들 연락처 몇 개를 받아두겠다면서 지인 정보를 빼간다. 개인정보를 다 빼간 뒤엔 '신용이 너무 낮다'거나 '첫 거래라서 10만 원밖에 빌려줄 수 없다'고 말을 바꾼다. 더 큰 금액을 빌리고 싶으면 대출 횟수를 늘리라는 거다. 이런 식으로 계속 거래를 하게 만들어서 더 많은 이자를 받아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인 정보 판 놈 구경 와라’ SNS 계정까지 개설
불법 사금융업체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예 SNS(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어 돈을 갚지 않는 사람들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SNS 주소를 지인들에게 보내 차주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30대 남성 박 아무개 씨도 올해 초 비슷한 문자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로 전송된 문자에는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함께 ‘OOO이 지인들 정보 파는 증거를 보러 오라’고 쓰여 있었다. 박 씨의 회사 동료였다. 해당 SNS에는 박 씨 회사 동료 외에도 수십 명의 사진이 게재돼 있었다. 이 가운데에는 신체가 나온 사진도 있었다.
피의자를 특정하는 건 쉽지 않다. 다수의 대부업체가 캄보디아 등 해외에 사무실을 두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 씨가 받은 문자 상단에는 ‘국외 발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외 발신 문자의 경우 금감원의 시스템 조회를 피할 수 있다.
일요신문이 만난 피해자들은 자신이 돈을 빌린 업체의 사무실이 어디 있는지는커녕 누구에게 돈을 빌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대부업자들이 차명계좌와 차명폰으로만 피해자와 소통했기 때문이다. 왕 차장과 김 실장 등의 호칭도 전부 익명이었다. 앞서의 A 씨 역시 김 실장 협박에 괴로워하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허위 연락처 담보로 넘겨 제3의 피해자 발생하기도
차주가 허위의 연락처를 대부업체에 넘겨 애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사례도 있다. 대출을 받기 전 실제 지인들의 연락처를 지우고 무작위로 만든 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한 후 정보를 넘기는 것이다. 20대 여성 김 아무개 씨는 최근 대부업체로부터 B 씨의 채무를 대신 변제하라는 협박성 문자를 받았다.
그러나 김 씨는 B 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대부업체에도 이를 설명했으나 이후로도 번호만 바꿔가며 변제 독촉 문자가 전송됐다. 김 씨는 “처음엔 전혀 모르는 사람의 돈을 대신 갚으라고 해서 황당한 정도였다. 모르는 사이라고 해명을 해도 번호까지 바꿔가면서 연락이 왔다. 이러다 해코지를 당하는 건 아닐까 점점 불안해졌다”고 했다. 김 씨는 결국 변호사 상담까지 받아야 했다.
전문가들은 불법 사채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선 사채업자와 단절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한다. 이기동 소장은 “원금과 법정 이자를 갚았다면 불법 사채업자와의 대화를 차단하는 것이 좋다. 지인들에게 연락이 갈까 두렵겠지만 오히려 먼저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낫다. 사채업자 입장에서도 실제로 찾아가는 등의 불법 추심까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인들에게 물리적 위협을 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3년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상담 건수는 총 6만 3283건으로 2022년 6만 506건 대비 4.6% 증가한 수치다. 대출을 받고 피해를 우려하는 신고·상담 역시 1만 3751건으로 2022년 1만 913건과 비교해 26.0% 증가했다. 금융감독원 측은 “특히 불법 대출중개수수료 수취와 불법 채권추심 피해 신고, 상담이 크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