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차별화로 성공한 2인자 사례 없어…보수 지지층 세 불리며 인내 전략 들어간 듯
#용산엔 햇볕을, 야당엔 강풍을
한동훈 대표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대통령실을 향해 잇따라 목에 핏대를 세웠다. 윤 대통령 대국민담화가 사흘 앞으로 다가온 11월 4일에만 해도 당 최고위원회에서 윤 대통령을 대놓고 때렸다. 그는 “국민들이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대통령께서 솔직하고 소상하게 밝히고 사과를 비롯한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통령실 참모진 전면 개편과 쇄신용 개각, 김건희 여사의 대외활동 즉시 중단, 특별감찰관 임명 등을 요구했다. 한 대표는 앞서 10월 21일 윤 대통령과의 면담에서도 김 여사 관련 3대 조치(대외 활동 중단·대통령실 인적 쇄신·의혹 규명 협조)와 특별감찰관 임명을 요구한 바 있다.
이에 더해 한 대표의 요구 사항이 김 여사 관련 범위를 넘어 국정전반으로 커졌다. 한 대표는 “민심이 매섭게 돌아서고 있다. 독단적인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 반감이 커졌다는 점을 아프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정 기조의 전환이 반드시 더 늦지 않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모습에 여권에서는 한 대표를 향해 ‘내부 총질’ ‘배신자’ ‘황태자의 배신’이라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생중계 카메라를 통해 국민들과 만난 이후부터 한 대표는 다른 사람이 됐다. 용산을 향해 때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용산에 대해서는 햇볕을, 야당 쪽으로는 강풍을 날리는 전통적 여당 대표 모습으로 한 대표가 급변했다.
윤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당일 친한계 일부가 ‘대통령 때리기’에 나섰지만, 한 대표는 말을 아꼈다. 입장 발표를 하루 묵힌 한 대표는 다음날인 8일에도 육성도 아닌 SNS를 통해 “이제 중요한 것은 민심에 맞는 수준으로 구체적으로 속도감 있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 뒤 “민심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국민 앞에서 더 겸손하고 겸허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담화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던 몇몇 친한계 의원들과는 달리 무색무취한 논평을 낸 것.
이후 한 대표는 대통령실을 향한 공세를 완전히 거두고, 야당 쪽으로만 포문을 열었다. 11월10일에는 SNS에 11월 잇따른 선고 공판을 앞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해 “(이 대표가) 무죄라면 ‘판사 겁박 무력시위’ 대신 ‘재판 생중계’를 하자고 해야 한다”고 쏘아붙였다.
다음날부터 한 대표는 본격적으로 여권 전체를 향해 동조화 메시지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11일 당 정책위원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을 맞아 개최한 ‘전반기 국정성과 보고 및 향후 과제 토론회’에 참석,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그간의 정부 성과를 설명하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했다.
한 대표는 윤석열 정부의 지난 2년 반 성과로 한일관계 정상화, 화물연대 불법파업 해결, 원전 생태계 복원 등을 꼽으면서 칭찬 릴레이를 펼쳤다. 한 대표는 “한일 관계를 과감하게 정상화해 지난 정부 동안 뒤틀려있던 한미 관계가 복원되고 한미일 공조로 이어졌다”며 “대단한 성과였고, 윤석열 정부는 이것 하나만 두고도 역사 속에서 평가받을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제3자 추천 채 해병 특검’에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을 내놓는 등 특검에 유연한 입장을 보이기도 했던 한 대표는 최근 민주당의 ‘특검’ 공세에는 단호히 선을 긋고 나섰다. 민주당이 세 번째로 처리한 ‘김건희 특검법’ 수정안에 대해 한 대표가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 대표는 14일 윤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 출국길에도 배웅했다. 불과 한 달 전 윤 대통령 동남아 순방 배웅길에 불참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 한 대표 측은 부산 금정구청장 보궐선거 지원유세 때문이라며 설명했지만, 윤 대통령에 대해 한 대표가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표했다는 게 정치권의 유력한 해석이었다. 실제 한 대표는 10월 5일 SNS에 부산 일정을 하루 늘렸다고 소개했는데, 대통령 순방 일정을 모를 리 없는 당대표가 대통령 일정을 모른 체했다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당일 친한계 의원 20여 명이 모였는데, 일종의 세 과시를 하면서 순방 나가는 대통령을 패싱했다는 당내 비판도 나왔다.
국민의힘 영남권 한 현역 의원은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 대담을 기점으로 한 대표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데 동의한다”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기류가 확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판 읽으며 영리한 선택
정치권에서는 영리한 한 대표가 판례를 보듯 과거 정치사 여러 사건들을 익히면서 정치판을 읽는 능력을 길렀고, 현재 상황을 다양한 예전 사례에 빗대 분석하는 실력도 기른 것으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의 차별화 성공 사례가 우리 헌정사에서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무모하게 기존 전략을 고수하기보다 어떻게든 특정 시점을 찾아 자신이 써왔던 차별화 출구 전략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과거 ‘차별화 사례’는 결과가 뻔했다. 현 상황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자주 호명되는 이회창 전 신한국당 총재가 차별화의 대표적 실패 사례다. 김영삼 대통령(YS)이 발탁했지만 차별화를 통해 다른 길을 가려했던 이 총재는 대놓고 YS의 탈당을 요구했고, 당 행사에선 YS 인형이 등장해 주먹과 발길질까지 이어졌다. 결국 YS는 대통령 임기 말 신한국당을 탈당했지만 이 총재에 대한 분노를 금치 못했고 이인제 후보가 이 총재의 대항마로 출마하는 것을 방관, 여당 지지층을 분열시켜 이 총재의 청와대행을 막아버렸다.
김대중 대통령(DJ) 임기 후반기엔 재선그룹인 천정배·신기남·정동영 의원(천·신·정)의 ‘정풍운동’이 여권을 강타했다. 이들은 DJ에게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최고위원의 2선 후퇴를 요구했고, 권 최고위원은 직을 사퇴했다. 결국 정풍운동 주역들은 DJ의 감정선을 건드렸고, 차기 대선후보 지위는 예상 밖의 인물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로 갔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후반기에는 ‘노무현 황태자’로 불렸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다. 정 의장은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뒤 김한길 의원 등 비노계와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고 대선 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그 역시 노 대통령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고, 이 여파로 인해 대선 사상 최대 격차인 500만 표차로 보수야당 이명박 후보에게 참패했다.
박근혜 대통령 임기 후반기엔 ‘박근혜 비서실장’ 출신인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책을 고리로 차별화에 나서며 대통령과 극한 갈등을 빚었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의 임기가 중반으로 접어들던 2015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로 청와대를 직격했다. 이에 격분한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배신의 정치를 심판하자”며 분노를 분출했고, 유 원내대표는 원내대표직을 떠난 뒤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TK(대구·경북)에서 ‘배신자’로 찍히는 등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현재 권력에 대한 여권 유력 주자의 선긋기는 무조건 실패했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당시 차별화를 했다고 하지만 그 결과로 대통령이 된 게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 말 지지율 추락으로 대체재를 구하지 못하면서 박 대통령에게 자리가 돌아가게 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한동훈, 인내력에 승패 달렸다
한 대표가 윤 대통령과 차별화 전략을 펴는 과정에서 한 대표의 차기 지도자로서의 선호도가 급등하기는커녕 하락 추이를 면치 못한 것도 전략 변화를 가져온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윤 대통령과의 차별화만으로는 한 대표가 여권의 차기 맹주로 올라서는데 한계가 명확하다는 게 드러난 것이다.
특히 한 대표가 홍준표 대구시장의 견제가 쏟아지는 속에서 국민의힘 최대 지지층인 영남에서 압도적 지지율 상승세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차별화 전략을 지속하기에 부담이다. 영남에서는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면 헤어나기 어려운데 이 굴레에 갇힐 위기에 놓인 것.
한 대표는 차별화가 아닌 윤 대통령과의 동조화 전략을 펴면서 상당 기간은 득점보다는 실점 최소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또 내부적으로는 자강 노력을 통해 TK 등 보수정당 콘크리트 지지층을 중심으로 세 불리기에 집중하면서, 차별화 전략을 펼 시점을 노린다는 것이다.
실제 한 대표는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사진전’ 개회식에 참석, 축사를 통해 “산업화의 쌀로 밥을 지어 먹게 해주신 박 전 대통령을 기억하고 존경한다. 대한민국의 정신을 기억하고 보수당이 이어받아야 한다”며 영남권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보수 지지층에 바짝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당원게시판에 윤 대통령 부부 비방 글이 한 대표 본인과 가족들의 이름으로 올라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한 대표는 받아치기보다 상황을 진정시키고 누그러뜨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한 대표는 14일 국회에서 이 논란에 대해 “굉장히 중요한 여러 사안이 많은 상황에서 없는 분란을 만들어 분열을 조장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만 밝혔다.
국민의힘 한 중진 의원은 “대통령 임기 중반부터 차기 주자가 대통령의 시간을 점유한 적은 없었다”며 “한 대표가 정치적 꿈이 크다면 이제 인내력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