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주주환원 고민 시작…개인투자자·행동주의펀드·국민연금 존재감 ‘쑥’
금융감독원(금감원)은 지난 2일 이수페타시스의 유상증자에 제동을 걸었다. 이수페타시스가 유상증자를 위해 제출한 증권신고서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이수페타시스의 유상증자에 대해 비지배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행보라며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던 터다.
이수페타시스는 유상증자를 통해 약 5500억 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기존 발행주식의 31.7%에 달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지분 희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지배주주들의 반발을 샀다. 지분 매각에 관심이 적은 지배주주 입장에서는 지분 희석을 감수하고서라도 장기 계획에 따라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 비지배주주들은 그렇지 않다.
금감원이 이수페타시스에 내린 조치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유상증자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어서다. 시장에서는 금감원의 조치를 두고 비지배주주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권신고서를 다시 제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비지배주주의 목소리가 기업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양새다.
과거 지배주주 중심의 경영에 대한 감시와 비판은 시민단체가 주도했다. 시민단체 활동 경력이 있는 재계 관계자는 “과거 재계 주요 그룹에 대한 문제점은 시민단체의 감시와 비판으로 드러났는데, 지금은 비지배주주들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지배주주의 한 축을 담당하는 개인투자자가 크게 증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2019년 612만 명 수준이었던 개인투자자 규모는 2024년 현재 1500만 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단순히 수만 는 것이 아니다. 개인투자자들은 미국·일본 등 해외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자본시장에 투자자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자본시장과 해외 자본시장 기업의 지배구조를 직접 비교할 수 있게 됐다. 김형균 차파트너스 본부장은 “코로나 사태 이후 개인투자자가 국내 증시뿐 아니라 선진 자본시장인 미국 증시에 상장된 기업들에 투자하면서 국내 상장사의 지배구조 문제를 깨닫게 된 것 같다”며 “그 결과 지배주주 중심의 경영을 견제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펀드들의 활동이 왕성해진 것도 눈에 띄는 모습이다. 행동주의펀드들은 기업 이사회에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를 사외이사로 합류시키면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JB금융, 삼성전기, 사조오양, 태광산업 등은 모두 행동주의펀드 측이 내세운 사외이사를 받아들였다. 2000년 중후반 등장한 장하성펀드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췄던 행동주의펀드들이 시장에 참여해 개인투자자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행동주의펀드는 불투명한 지배구조 탓에 내재가치보다 주가가 낮게 형성된 기업의 지분을 매입한 후 정상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 주가를 올린 뒤 차익을 실현한다. 이들 행동주의펀드는 지분 매입 과정에서 기존 지배주주 및 경영진과 경영권 분쟁을 겪는 경우가 많다.
주목할 만한 점은 기존 사모펀드 회사인 MBK파트너스도 행동주의펀드를 표방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MBK파트너스가 영풍과 연합해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를 위한 공개매수에 나선 것은 대표적인 행동주의펀드 전략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행동주의펀드가 새삼 활발히 활동하는 이유는 국내 재계 일부 그룹이 3세 경영인 시대를 지나면서 지배구조가 취약해져서다. 승계 과정에서 가족끼리 지분을 나눠 갖고 이를 통해 계열분리를 감행하면서 지배력이 취약해진 그룹이 다수 등장했다. 약해진 지배력을 극복하기 위해 재원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지배주주가 사익을 편취하는 경우가 있는데 행동주의펀드가 그 틈을 파고들어 목소리를 내고 있다.
1146조 원(2024년 9월 말 기준)의 재원을 보유한 국민연금도 주주로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의 주주총회 안건 반대율은 2020년 11.2%에서 2023년 13.8%로 상승했다. 2018년 도입된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한 결과다.
특히 국민연금은 지배주주 중심의 경영에 제재를 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임원보수’에 대한 안건의 28.6%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그동안 ‘임원보수’를 두고 지배주주에게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지급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지난 8월 국민연금은 주주이익 훼손이 우려된다며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에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당시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이 SK이노베이션 일반주주들에게 불리하다는 평가가 나온 바 있다. 양사 가운데 지배주주 일가의 직간접적 지분이 SK E&S 측에 많았던 터라 비지배주주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 아니냐는 의심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국민연금은 향후 더욱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전망이다. 국내 상장사에 경영권 분쟁이 늘면서 국민연금이 나서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압박이 높아지고 있다. 한 기관투자자는 “그동안 (정치적 부담 때문에)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적으로 적용해 의결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던 거 같다”며 “최근 비지배주주 이익 보호에 집중하는 시장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이창민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지배주주 외에는 비지배주주가 자신의 권익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구조였다”면서 “최근 한국 기업지배구조에 다양한 변수가 등장하면서 이해관계 당사자인 개인투자자·행동주의펀드·국민연금의 존재감이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