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MC’가 이런 짓을…? ‘신사의 나라’가 발칵
▲ AP/연합뉴스 |
40년간 영국 BBC 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하면서 ‘국민 MC’로 불렸던 지미 새빌이 ‘희대의 성폭행범’이란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영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지난해 84세의 나이로 사망한 새빌은 방송 활동 외에도 왕성한 자선활동을 벌여 기부천사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심지어 대영제국훈장과 기사 작위까지 받은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사실은 남몰래 미성년자에게 몹쓸 짓을 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재 영국인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진 상태. 생전에 그로부터 성추행 혹은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만 어림잡아 300~400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되자 영국인들은 심지어 그의 무덤이라도 파헤쳐 벌을 내릴 기세다. 영국인들을 더욱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새빌이 상습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던 BBC 방송국과 병원, 소녀원, 보육원 등의 관계자들이 그의 악행을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아 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일 경우 약자의 고통을 강자들이 집단으로 묵인하는 이른바 ‘영국판 도가니’ 사건이 벌어진 셈이다. ‘어린이들의 천사’가 아닌 ‘어린이들의 악마’였던 새빌의 추악한 성범죄 사건 속으로 들어가봤다.
▲ 2000년 한 라디오방송국의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미 새빌(가운데). |
방송에 따르면 새빌은 1960~70년대 BBC 방송국 분장실이나 자원봉사를 하던 병원, 혹은 자신의 카라반 안에서 상습적으로 소녀들을 성폭행 또는 성추행했으며, 피해자는 최대 열 명가량이었다. 당시 14세였던 카린 워드란 여성은 새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장실 안에서 프로그램 게스트였던 록가수 게리 글리터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BBC 방송국 스태프들이 직접 소녀들을 새빌의 분장실 안으로 들여보내곤 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성상납’이 상습적으로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방송이 나가자 영국 사회가 쑥대밭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다음 날 영국 경찰은 바로 수사를 시작했고, 마치 둑이 터진 듯 여기저기서 제보 전화가 쏟아졌다. 방송 일주일 만에 피해 여성 40명이 경찰에 연락을 해왔으며, 지난 11월 19일까지 경찰이 증언을 토대로 확보한 새빌의 성범죄 건수는 무려 400여 건에 달했다. 이로써 피해자는 300~4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태다.
‘영국 역사상 최악의 아동 성범죄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번 사건으로 가장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BBC 방송국이다. 무엇보다도 새빌이 성범죄를 저지른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그의 악행을 은폐 혹은 방조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지난해 새빌의 성폭행 의혹을 취재하고도 방송을 보류했다는 점은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다.
실제 BBC는 지난해 11월 탐사보도프로그램인 <뉴스나이트>가 취재한 새빌의 성범죄 사건 다큐멘터리를 방송 직전 갑자기 취소하고 대신 새빌을 추모하는 방송 세 편을 방영한 바 있다. 당시 피터 리펀 담당편집장은 그 이유에 대해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러니 ITV의 다큐멘터리로 촉발된 분노가 BBC로 번진 것은 당연한 일. 이를테면 BBC가 그간 프로그램의 시청률과 인기 때문에 새빌의 범죄를 묵인해온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지금까지 새빌의 성범죄 의혹은 여러 차례 제기되어 왔지만 BBC는 그때마다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해왔다. 하지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BBC 직원들이 새빌에게 방청객 가운데 소녀들을 주기적으로 성상납했거나 성폭행 사실을 덮어줬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례로 새빌이 진행했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인 <톱 오브 더 팝스(Top of the Pops)>의 스태프들 가운데 ‘새빌의 이너서클(최측근)’이라고 불렸던 카메라맨 등 네 명 역시 소아성애자들이었으며, 이들이 소녀들을 주기적으로 성폭행하면서 공유했다는 소문은 직원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최근 사태가 악화되자 BBC는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리펀 등 관계자들을 보직해임하는 등 사태를 수습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뉴스나이트>의 방송 보류를 심층 취재한 또 다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내사를 벌이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새빌의 성폭행 의혹이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은 BBC뿐만은 아니다. 영국 경찰의 수사력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실제 경찰은 과거 여러 차례 제보를 받고 새빌의 성폭행 사건을 수사했지만 번번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수사를 중단했다. 지금까지 새빌이 경찰 조사를 받은 횟수만 여섯 차례였지만 단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새빌은 1958년 고향인 리즈에서 나이트클럽 매니저로 일할 당시 미성년 소녀들과 성관계를 갖는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것을 시작으로, <톱 오브 더 팝스>의 분장실에서 미성년자들을 성폭행한 혐의와 백댄서였던 15세 소녀의 자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각각 한 차례씩 조사를 받았다. 또한 자원봉사 활동을 하던 ‘스토크 멘더빌 병원’에서 어린 환자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지만 역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구속되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 조사를 받은 것은 지난 2007년과 2008년 각각 한 차례씩이었다. 서리주의 ‘던크로프트 소녀원’과 서식스주의 보육원의 소녀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새빌은 하지만 이번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유유히 풀려났다.
이에 영국인들은 생전에 새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영국 경찰이 그의 범죄 행위를 눈감아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새빌은 매주 고위 경찰 간부들과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조찬 모임을 가졌으며, 심지어 성폭행 혐의를 받고 경찰 조사를 받을 때에도 이 모임은 계속됐다. 새빌의 한 친구는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새빌은 20년 동안 전현직 경찰 간부 아홉 명과 ‘금요일 조찬 클럽’이라고 불렸던 모임을 가졌다”고 말했다.
새빌은 생전에 아동 성범죄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었다. 죽기 5년 전 가졌던 라디오 생방송 <뉴스토크>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성범죄 의혹에 대해 “그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다”고 말했는가 하면, 2000년 영화감독 루이스 서룩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음흉한 타블로이드 기자들이 내가 소아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1990년 <인디펜던트온선데이>를 통해서는 “소녀들이 내 주위에 몰려드는 것은 사실 나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유명 스타를 만나기 위해서 나에게 몰려드는 것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모두 거짓말일 확률이 높아졌다. ITV 다큐멘터리 방송이 나간 이후 영국 각지에서 쏟아지는 제보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잔혹한 늑대였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은 철거됐으며, 현재 훈장 및 기사 작위를 박탈할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새빌의 이름을 따서 세워진 많은 건물들과 기관들은 속속 이름을 바꾸고 있고, 기념 조각상들도 하나둘 철거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60~70년대 방송국을 지배했던 마초 분위기가 이런 성폭행을 방조하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많은 방송국 관계자들과 연예인들은 여성팬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여겼으며, 이런 생각에서 성폭행을 자행하고 또 용인했었다.
▲ 투병중인 15세 소녀도 새빌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 |
이런 그의 범죄를 병원 측이 눈감아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가 모금하는 기부금 액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일례로 ‘스토크 멘더빌 병원’의 척추센터에 그가 전달한 기부금은 4000만 파운드(약 690억 원)에 달했다.
이처럼 속속 드러나는 그의 성범죄에 치를 떨고 있는 영국인들은 비록 새빌이 세상을 떠났지만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경찰도 아동 성범죄 단죄를 천명하면서 고삐를 죄고 있다. 사건의 진원지인 BBC 방송도 내사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금이 간 신뢰를 회복하는 데 온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많은 영국인들은 ‘이번 사건은 어째 캐면 캘수록 더욱 구린 냄새가 난다’며 이번 스캔들이 쉽게 진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실제 이번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 조사를 받는 인물들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 가운데는 록스타 게리 글리터, 전 BBC 프로듀서, 코미디언, BBC 라디오 진행자 등도 포함되어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 새빌(가운데)이 진행하는 BBC의 생방송 프로그램. |
▲ 새빌에게 성폭행 당한 것으로 알려진 던크로프트 소녀원 여학생들. |
“생방송 도중 엉덩이를…깜짝 놀라”
지미 새빌이 생전에 성범죄를 저지른 무대는 비단 BBC 방송국뿐만은 아니었다. 그는 병원, 소녀원, 보육원, 카라반, 자택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소녀들을 희롱했으며, 당시 10대 소녀였던 피해자들은 수치심을 안고 지난 30~40년 동안 침묵하면서 살아야 했다.
뒤늦게 입을 열고 있는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보면 과연 그가 왜 ‘희대의 성폭행범’으로 불리는지 쉽게 알 수 있다.
▲ 방송국
익명의 한 여성은 지난 1963년 새빌이 진행을 맡았던 ‘라디오 룩셈부르크’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것을 계기로 새빌을 알게 됐다. 당시 16세의 숫처녀였던 그녀는 엘비스 프레슬리 광팬이었으며, 프레슬리로부터 직접 받아온 선물을 주겠다는 새빌의 말에 넘어가 호텔방을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성폭행 당한 후 임신까지 했던 그녀는 결국 낙태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생방송 도중 새빌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유튜브 동영상 속의 당사자인 실비아 에드워즈는 당시의 끔찍했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19세였던 그녀는 <톱 오브 더 팝스> 생방송 도중 새빌의 옆에 서 있다가 성추행을 당했다. 새빌은 천연덕스럽게 진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에드워즈의 엉덩이를 만져댔고, 깜짝 놀란 에드워즈는 자리에서 펄쩍 뛰었지만 생방송 중이라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아야 했다. 그리고 방송 직후 BBC 직원에게 불평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꺼져!’라는 한마디 뿐이었다.
또한 익명의 한 여성은 30년 전 BBC 방송국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새빌의 카라반 안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미인대회 출신이었던 그녀는 당시 22세였으며, 경찰에 신고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 케빈 쿡 |
▲ 병원
새빌이 20년간 자원봉사자로 일했던 ‘스토크 멘더빌 병원’에서 그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의 엽기적인 행각은 간호사들이나 어린 환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했으며, 심지어 환자들 사이에서는 “다음에는 우리들 중에 누가 그의 ‘작은 방’에 선택돼서 불려갈까?”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의 방문을 불쾌해했던 간호사들이 오죽하면 어린 환자들에게 “새빌이 병실에 나타나면 침대에 누워서 조용히 잠든 척하는 게 최선이다”라고 귀띔해 줄 지경이었다.
간호사 병동의 방 한 칸에서 숙식했던 그는 주기적으로 간호사와 환자들을 성폭행 및 성추행했으며, 수술 후 회복단계에 있던 어린이나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 어린이 혹은 휠체어에 앉아있는 어린이까지 닥치는 대로 추행했다.
지금까지 최연소 희생자로 알려진 소녀는 당시 8세였으며, 수술 후 병상에 누워있는 상태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또한 20세 자원봉사자였던 한 여성은 ‘섹스 강사, 첫 번째 수업은 공짜’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새빌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는가 하면,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캐롤린 무어는 병원 복도에서 새빌로부터 강제 키스를 당했다.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환자들 역시 그의 노리개감이었다. 새빌은 ‘오락 치료법’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둘러댄 미성년자들을 위한 디스코 파티를 개최해서 소녀들을 초대한 다음 겁탈하곤 했다.
▲ 소녀원
‘던크로프트 소녀원’에서 생활하던 여학생 네 명은 70년대 소녀원을 방문했던 새빌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이 가운데는 14세 소녀도 있었으며, 그녀는 “새빌은 1년에 두어 차례 학교를 방문했다. 올 때마다 선물을 들고 왔으며, 그를 ‘슈퍼스타’라고 여기는 여학생들과 지나치게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
▲ 보육원
1971년 11세, 9세의 자매를 차례로 성추행했으며, 지금까지 무려 192명의 소녀들이 성추행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