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곡법 등 6개법안 거부권 행사에 야당 탄핵카드로 압박…내란 특검·헌법재판관 임명 등 놓고 장고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14일 탄핵돼 직무가 정지되면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됐다. 한덕수 대행은 탄핵안 통과 직후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한민국 국무총리로서 우리 국민이 처한 현 상황과 그에 이르게 된 전 과정에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송구스럽다”고 사과했다. 이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정에 있어서 한 치의 공백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일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헌법과 법률에 따라, 안정된 국정운영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다짐했다.
한 대행은 12월 14일 오후 7시 24분부터 △조약 체결·비준권 △선전포고권 △국군통수권 △긴급명령 및 긴급경제명령 발동권 △계엄선포권 △공무원 임면권 △사면권 등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한 대행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것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도 많다. 한 대행 역시 윤 대통령 내란 혐의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행은 윤 대통령이 12월 3일 심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 개최한 국무회의에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이상민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김영호 통일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 9명 국무위원, 조태용 국정원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오후 10시 17분부터 10시 22분까지 5분간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적인 개회·종료 선언은 이뤄지지 않았고, 국무위원들의 발언 속기 등 별도 기록도 남기지 않아 ‘부실 회의’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 대행 역시 12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계엄 긴급 현안질의에서 이날 국무회의에 대해 “많은 절차적·실체적 흠결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한 대행과 다수 국무위원들은 비상계엄 해제 이후 ‘계엄령 선포 사실을 사전에 몰랐다’ ‘국무회의에서 계엄 선포에 대한 우려와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 계엄 선포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정치적·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찰은 내란죄 혐의로 고발당한 한덕수 대행을 피의자로 입건했다. 한 대행을 포함해 비상계엄 관련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국무위원, 조태용 국정원장 등 11명에 대해 조사를 위해 소환을 통보했다. 한 대행은 13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소환 통보를 받은 데 대해 “수사 절차에 따라서 잘 협력하도록 하겠다”고 원론적 입장을 밝혔다. ‘계엄 동조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는 “그런 적 없다”며 “적극 수사에 협조해 수사당국이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행은 경찰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에 피의자 신분으로 비공개 대면조사를 받은 것으로 12월 20일 밝혀졌다. 야권에서는 내란에 가담한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길 수 없다며 탄핵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하지만 민주당은 한 대행 탄핵을 유보했다. 이재명 대표는 12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내란 사태 책임을 물어 한 대행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국정 혼선을 초래할 수 있어 일단 탄핵절차를 밟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현상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여권에서는 민주당이 한 대행을 상대로 ‘탄핵’이라는 인질을 움켜쥐고 있는 만큼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내주고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 탄핵이 헌재에서 인용돼 조기 대선이 열리더라도, 보수 진영에서는 이재명 대표의 대통령 당선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려면 한덕수 대행이 국정을 이끌고, 국민의힘 대권주자들이 전면에 등장해 국정운영을 보조해야 한다”며 “지금 형국은 한 대행이 양손이 묶인 채 민주당과 이 대표에 끌려가는 상황이다. 이래서는 조기 대선에서 정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재명 대표는 각종 여론조사의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조원씨앤아이가 스트레이트뉴스 의뢰로 지난 12월 14~16일 사흘간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대권주자 적합도’에서 이재명 대표가 48.0%로 가장 높았다. 2위인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8.0%였다. 홍준표 대구시장 7.0% 오세훈 서울시장 5.7% 김동연 경기지사 5.7%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4.8%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 4.0%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 2.8% 등으로 뒤를 이었다(여론조사의 자세한 사항은 여론조사기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정치권에선 한 대행이 야당 주도로 추진된 법안들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지에 관심이 높았다. 민주당은 한덕수 대행에게 적극적 권한 행사 대신 현상 유지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통령 권한대행도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기간에 고건 당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사면법 개정안 등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다. 그때 한 대행은 고 대행을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이었다.
한 대행은 12월 19일 국무회의를 통해 양곡관리법·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어업재해대책법·농어업재해보험법 개정안 등 농업4법, 국회법 개정안, 국회 증언감정법 개정안 등 6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 법안들에 대해 정부는 11월 28일 윤 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한 바 있다. 권성동 원내대표 역시 13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에, 15일은 한덕수 대행을 만나 6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요청했다.
한 대행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당이 말한 ‘적극적 권한 행사’로 비칠 수 있어, 17일 국무회의 안건으로 바로 상정하지 않고 눈치보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은 거부권 행사였다.
한 대행은 “국가적으로 매우 엄중한 상황에 어떤 선택이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인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고민과 숙고를 거듭했다”며 “어느 때보다 정부와 여야 간 협치가 절실한 상황에서 국회에 6개 법안에 대한 재의를 요구하게 돼 마음이 매우 무겁다. 그러나 정부는 헌법 정신과 국가의 미래를 최우선적으로 하는 책임 있는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명백한 입법권 침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종면 원내대변인은 “마지막 경고다. 한 대행은 선을 넘지 말라”며 “거부권을 행사한 사람의 이름만 윤석열에서 한덕수로 바뀌었을 뿐, 내란 정권의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 대행이 12·3 내란 사태의 책임이 있는 피의자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민주당은 한 대행이 내란 수괴와 그 잔당들을 위해 부역할 수 있다는 점을 한시도 간과하지 않는다. 내란 부역으로 판단되는 즉시 끌어내리겠다”고 다시금 탄핵 가능성을 경고했다.
민주당에 따르면 이미 ‘한덕수 대행 탄핵소추안’을 작성해 언제든 발의 가능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민주당이 바로 한 대행의 탄핵 추진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전해진다.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당내에서 논의가 진행 중인데 결론을 내지 못했다”며 “권한대행이 해야 할 여러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전했다.
민주당이 국정공백 우려 속에 숨을 고르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황에서 국무총리까지 연이어 탄핵하면 국정 안정을 고려하지 않은 독선이라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민주당 내부에선 최우선 순위를 고려한 계산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윤석열 탄핵국면에서 농업4법 등이 시급한 문제는 아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 다시 입법 추진하면 된다”며 “한덕수 대행 입장에서도 이들 6개 법안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전에 이미 거부권 행사를 요구한 사안이다. 행정적 연속성 차원에서도 거부권 행사의 명분을 봐줄 면도 있다”고 귀띔했다.
분수령은 내란 및 김건희 특검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를 통과한 두 법안은 지난 17일 정부로 이송됐다. 김건희 특검법은 국민적 필요성이 높게 대두되는 상황에서도 윤 대통령이 세 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로 돌려보낸 바 있다.
민주당 등 야당이 본회의 처리한 ‘내란 특검법’은 수사대상에 한 대행도 포함돼 있다. 한 대행이 내란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본인과 관련된 특검법에 스스로 거부권을 행사한 모양새가 된다. 그러다보니 한 대행이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선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 대행이 두 특검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민주당은 바로 탄핵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재명 대표는 12월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유감스럽게도 한덕수 대행이 거부권을 남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국회 입법권을 무시한 형태가 반복되는 셈”이라며 “대통령의 헌법과 계엄법 위반에 대한 국민의 뜻은 엄중하다. 민의에 따라 특검법을 신속하게 공포하길 바란다”고 압박했다.
한 대행은 내란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최대한 시간을 끌고 가는 지연작전을 펼 것으로 보인다. 두 특검법의 처리 시한은 2025년 1월 1일이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18일 특검법 거부권 행사 여부에 “어느 것이 헌법과 법률에 맞는지 점검하겠다”며 “12월 31일 마지막까지 검토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새해 첫날은 휴일이라 하루 전인 31일 특검을 수용할지, 거부권을 행사할지 결정하겠다는 취지다.
두 특검법 거부권 행사 여부와 함께 신임 헌법재판관 임명도 한 대행 손에 달린 중요한 과제다. 현재 헌재는 재판관 정원 9명 중 3명이 부족한 6인 체제다. 대통령 탄핵이 인용되려면 헌법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현 상황에서는 단 한 명만 반대해도 대통령 탄핵이 기각된다. 이에 민주당은 나머지 재판관 3명의 임명 절차를 신속히 밟고 있다. 반면 국민의힘은 헌법재판관 임명은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라며 대통령 탄핵안이 인용되기 전까지 재판관 임명은 불가능하다고 버티고 있다.
국민의힘이 마은혁 정계선 조한창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위한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에 불참하면서, 야당이 단독으로 청문회 절차 안건을 처리했다. 야당은 오는 23~24일 인사청문회를 실시한 후, 오는 27일 본회의에서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한 대행이 국민의힘 주장을 받아들여 재판관 임명을 미룰 수 있다.
야권에서는 내란 특검법과 헌법재판관 임명을 한 대행 탄핵 추진 여부에 가장 최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모양새다. 두 사안이 윤 대통령 탄핵 인용에 핵심 열쇠라고 보고 있기 때문.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내란 사태 종식의 핵심이 신속한 수사와 헌재 심판 진행”이라며 “(한 대행이) 이 두 가지를 방해한다면 당연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대행이 내란 특검법과 헌법재판관 임명까지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긴 하다. 앞서 언급했듯 한 대행은 내란죄 혐의로 현재 피의자로 입건돼 수사를 받고 있다. 내란 특검법에도 수사 대상에 올라있다.
야권 관계자는 “한 대행이 내란 특검법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헌법재판관 임명을 지연하면 곧장 탄핵될 것이다. 그럼 바로 사정기관 수사에 노출된다. 한 대행으로서 최선의 시나리오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사안에 대해서는 야당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는 식으로 정치적 타협을 이끌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