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훈 신념 무너뜨리려는 ‘최종 빌런’ 활약…“황인호·프런트맨·오영일 몇 퍼센트씩 보여줄지 고민”
“장면마다 제가 고민했던 건 여기서 내가 황인호로서, 프런트맨으로서, 그리고 오영일로서 몇 퍼센트씩 보여줘야 할까라는 것이었어요. 비록 내가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이곳에 있지만 시청자들이 나를 프런트맨으로 보게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퍼센티지를 나누는 게 가장 어려웠죠(웃음). 제가 등장하는 신마다 황인호, 프런트맨, 오영일이 계속해서 번갈아 나오길 바랐기 때문에 촬영 때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어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에서 흑막을 도와 ‘살인 서바이벌 게임’을 이끄는 프런트맨 역할을 맡았던 이병헌은 시즌 2에 이르러 직접 게임장 안에 뛰어들게 됐다. ‘오영일’이라는 가명으로 참가자들 사이에 스며든 그는 게임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참가번호 456번 성기훈(이정재 분)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미 수없이 ‘돈에 눈이 먼 인간의 악의’를 목격해 온 프런트맨과 그럼에도 ‘인간의 선의’를 믿으려는 성기훈이 각자의 ‘정의’를 위해 팽팽히 맞서는 모습은 생사가 갈린 극 중 서바이벌 게임보다 더한 긴장감을 안겨준다.
“프런트맨은 성기훈을 보며 자신을 투영시키고 있어요. 그는 이미 밑바닥 인생 속 아무 희망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나락까지 떨어져서 이 게임장에 서는 것을 선택했었고, 그곳에서 무자비한 죽음과 인간 본성의 바닥을 경험해 본 인물이에요. 성기훈 역시 그 모든 것을 겪고도 최종 우승자가 됐다는 게 프런트맨과 동일하죠. 그런 그에게서 자신을 비춰보고 있었기에 성기훈이 다시 게임에 참가하려 할 때 돌아가라고 막은 거예요. 하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이죠. ‘어디 들어와 봐. 네가 느끼는 신념이 잘못된 거란 걸 보여줄게’라는 식으로요.”
인생의 쓴맛을 똑같이 맛봤고, 인간의 끝 모르는 악의도 똑같이 목도 했고, 그 아비규환 속에서 마침내 최종 우승자가 됐다는 점까지 성기훈과 마치 쌍둥이처럼 닮은 프런트맨, 즉 오영일은 시작부터 게임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종료된 뒤, 다음 게임의 속행 여부를 묻는 참가자들 간 찬반 투표가 진행될 때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 ‘찬성 표’를 누르는 001번이 그의 정식 첫 등장이다. 이병헌은 “성기훈이 첫 번째 게임에서 참가자들에게 게임 방법을 이야기 해주고, 그들을 선동하며 게임을 막으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고 계획되지 않은 참가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런트맨과 전편의 게임 운영자인 오일남(오영수 분)은 커다란 측면에서 봤을 때 중요한 원칙이나 그 근간이 되는 생각들이 비슷했기에 함께 일할 수 있었을 거예요. 다만 프런트맨의 목적은 참가자들을 전부 죽이는 게 아니라 기훈의 신념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요. 그런 프런트맨의 키포인트 신은 참가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 기훈에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이야기냐’는 질문을 던지는 신이에요. 기훈은 부정을 못하고 결국 동의하게 되는데, 거기서 프런트맨은 혼자서 미묘하게 웃음 짓고 있어요. ‘드디어 네가 조금씩 무너져가는구나’ 이걸 아는 거죠.”
기훈의 신념을 근간부터 무너뜨리고자 하는 프런트맨은 ‘오징어 게임2’ 서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훈은 물론이고 시청자까지도 흔들고 있다. 교묘하게 기훈을 자극하는 말과 행동을 보이면서도 진실한 속내를 내비춰 그의 신뢰를 얻어내는가 하면,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참가자들의 승리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호해 시청자들마저도 아리송하게 만드는 그의 태도에서 이병헌이 선택한 설정은 ‘오영일에게 묻어있는 프런트맨과 황인호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내는 것이었다고 했다.
“게임장 안의 참가자들에게 오영일은 그냥 평범한 참가자로 보이지만 그곳에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는 실제 본인이 살짝 묻어날 때가 있어요. 예컨대 임신한 아내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임신한 준희(조유리 분)를 보면 남들보다 좀 더 챙겨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겼을 거고, 반대로 아이를 운운하며 덤비는 타노스(최승현 분)에겐 분노하며 프런트맨의 모습을 잠깐이나마 드러내요. 기훈에게 자기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이미 아내와 아이는 예전에 죽었는데 지금도 마치 병원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빼면 나머지는 다 진심이에요. 그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인호로서 말하는 거죠.”
기훈을 비롯한 참가자들로부터 신뢰를 쌓아온 프런트맨은 ‘오징어 게임2’의 대단원이자 마지막 7화 속 ‘성기훈의 반란’에서 본색을 드러낸다. 그간의 믿음을 바탕으로 반란의 중책까지 맡았던 ‘오영일’은 도리어 동지들을 죽여 버리고, 기훈의 앞에 ‘프런트맨’으로서 서서 그의 신념을 비웃는다. 이처럼 ‘성기훈의 신념을 무너뜨린다’는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프런트맨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기훈과 또 어떤 새로운 대립을 보여줄 것인지가 올 상반기 공개를 앞둔 ‘오징어 게임3’의 가장 관심사이기도 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프런트맨은 해마다 똑같이 사람을 죽여야 하니까 이걸 회사 사무 보는 것처럼 하고 있겠다’(웃음). 그것보다 저는 인간과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요만한 희망도 느끼지 못하기에 바깥세상에 아예 나갈 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이 게임장 안에 있는 거죠,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라(웃음). 그런 그가 기훈을 바라볼 때는 단순히 얘기한다면 ‘내가 느꼈던 것처럼 너도 빨리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고 (환멸을) 깨닫길 바란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0.00001%라도 네 말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아주 조금은 있었을지도 모르죠.”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시리즈 속, 두 번째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이병헌에겐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열연 호평이 이어졌다. “이전과 다른 연기, 다른 눈빛을 보여줬다는 말을 듣는 게 좋았어요. ‘지난번이랑 똑같긴 한데, 잘했어요’ 그랬으면 기분이 약간 달랐을 것 같은데”라며 ‘건치 웃음’을 터뜨린 그는 ‘오징어 게임’ 주역들 속 누구보다 지금 이 상황에 감회가 새로운 사람이었다. 2009년 영화 ‘지.아이.조’ 시리즈를 시작으로 ‘레드: 더 레전드’(2013), ‘터미네이터: 더 제네시스’(2015), ‘매그니피센트 7’(2016), ‘미스컨덕트’(2016)까지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들과 함께하면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오징어 게임’이 이뤄낸 변화가 더욱 눈부실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예전에 ‘지.아이.조’를 촬영할 땐 ‘야,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이 날 알아볼 텐데 어떡하지, 아이 참’ 하면서 행복한 고민을 했었죠(웃음). 그런데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그러다 이번에 정식 공개 전에 미국에 프로모션을 갔더니 2000명 넘는 팬들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을 입고 환호하는 거예요. 정말 감개무량하더라고요. 아마 다른 친구들보다 저는 훨씬 더 그렇게 느꼈을 거예요. 이건 제가 할리우드에서 작품을 하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니까요. 한국 감독이 한국 배우들과 만든, 한국말로 된 한국 작품을 가져갔는데 이렇게 성원하는 걸 보며 ‘우리나라 콘텐츠가 이만큼 (위상이) 올라갔구나’ 싶었죠. 그러면서 저 혼자 ‘난 그동안 뭐 한 거지?’ 이러고(웃음). 아마 다른 K-콘텐츠들과 K-팝 없이 ‘오징어 게임’ 혼자만 있었다면 이 정도로 올라올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다른 K-콘텐츠들이 이미 이만큼 올라와 있었으니까 거기서 좀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거죠.”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