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부자 1위 김 회장 2020년 소설 ‘영풍-고려아연 분쟁’ 맞물려 회자…재벌 신랄한 비판 내용 담아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의 자산은 2023년 4월 포브스 선정 한국 최고 자산가 순위에서 97억 달러(약 12조 8000억 원)를 기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김범수 카카오 의장을 제치고 한국 50대 부자 1위에 올랐던 그는, 2024년에는 이재용 회장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렸다. 다만 삼성전자 주식 부진, 달러화 강세 등을 고려할 때 2025년에는 다시 정상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흥미롭게도 국내 최고 자산가인 김 회장과 그의 저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영어 소설 ‘오퍼링스’는 여러 모로 특이한 책이다. 국내 최고 자산가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불편한 진실을 다룬 책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1997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칼럼 ‘21세기 앞에서’를 모은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와 비교될 수 있으나 이 회장 책이 미래 제언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퍼링스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구성도 독특하다. 영어 소설이지만 영어권 독자를 겨냥한 것 같지 않다. 소설 시작은 ‘to abuji’로, 내용 중간 중간 Gohayng(고향), Jangnam(장남) 등 영어권 화자가 봤을 때 무슨 소린지 모를 한국식 단어를 그대로 살렸다. 아마존 책 리뷰에서도 ‘충분한 설명 없이 한국어 용어를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가치투자자 A 씨는 “김 회장은 책을 쓰고 싶되, 광범위한 관심은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영어가 가능한 한국인을 독자로 상정한 듯하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한국적 정서와 용어가 녹아있다”고 말했다.
‘오퍼링스’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MBK의 현황을 살펴보자. MBK는 마이클 병주 김(Michael Byungju Kim)의 이니셜을 딴 사모펀드로, 운용자산 40조 원을 돌파하며 동아시아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캐피탈(현 KB캐피탈)을 시작으로 KT렌탈, 딜라이브(구 씨앤앰), 코웨이, 두산공작기계, 홈플러스, 오렌지라이프(구 ING생명, 현 신한라이프), 롯데카드 등을 차례로 인수했다. 주로 재무구조가 취약하거나 매각이 필요한 기업들을 인수해 정상화한 뒤 매각하는 전략으로 성과를 냈다.
2023년부터 MBK의 행보가 달라졌다. 2023년 1월 유니슨캐피탈코리아(UCK)와 함께 '텐티스트리인베스트먼트' 컨소시엄을 구성해 오스템임플란트를 공개매수하고 상장폐지에 성공했다. 이어진 전환점은 한국앤컴퍼니그룹(옛 한국타이어그룹) 공개매수였다.
2023년 12월 조현식 전 고문과 손잡고 경영권 인수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2024년에는 고려아연-영풍 분쟁에서 영풍 측 인수 지원에 나섰다.
재벌가 경영권 분쟁에 연이어 개입하는 김병주 회장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 단서를 ‘오퍼링스’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소설 ‘오퍼링스’는 표면적으로 IMF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금융 드라마다. 소설 내용을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0대에 유학을 떠난 주인공 대준(영어명 셰인)은 하버드를 나와 투자은행에서 경력을 쌓다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하버드 동창인 일성그룹 장남 현석(영어명 웨인)을 만나 자동차 부문 매각을 자문하게 된다.
대준은 영진과 어울리며 재벌의 부실한 지배구조와 도덕적 해이를 목격한다. 대준은 일성자동차 매각 대목에서 오히려 재벌의 비리들을 적극적으로 공개해 매각을 무산시킨다. 다임러-벤츠와 협상에서 대준은 자산만을 매각하려는 의뢰인의 의사에 노동자 고용보장을 필수 조건으로 내세운다. 결국 일성그룹은 파산하고 대준은 방산그룹 회장 딸 지연과 결혼해 독일로 가게 된다. 대준은 지연 사이에서 ‘태’라는 아이를 낳고, 이들이 아버지 제사를 올리면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오퍼링스’는 현실과 많은 부분이 겹친다. 우선 김병주 회장과 주인공 대준의 삶이 흡사하다. 김 회장은 1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하버포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를 꿈꾸다 하버드 MBA를 받았다. 주인공 대준 역시 리버럴 아츠를 거쳐 하버드를 나온다.
실제 일화가 소설에 그대로 반영된 경우도 있다. 한국경제신문 ‘1조 원의 승부사들’(2015)에 따르면, 김 회장은 영어를 전혀 못한 채 홀로 미국에 갔다고 한다. 김 회장은 “아버지가 무조건 영어책을 소리 내어 읽으라 했다”는 그의 회고는 소설 속 아버지가 대준에게 하는 조언과 일치한다. 소설 말미의 감사 인사에서 “마지막은 물론 엄마, 평생 이야기들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해, 가장 강력한 얘기인 당신 자신의 얘기를 포함해서”라고 쓴 것으로 미루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작품에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천문학적 자산가가 된 김 회장 가문은 베일에 싸여 있다. 1970년대에 10대 소년을 미국 유학 보낼 정도면 평범치 않았을 것이란 추측만 있을 뿐이다. 소설 속 대준의 아버지는 정보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에 실망해 군복을 태우고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그려진다. 대준의 아버지는 정보장교로서 박정희 대통령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무기한의 절대 권력'을 보장하는 유신헌법 선포를 계기로 결별을 선택한다. 그의 양심이 더 이상 체제에 동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통령과의 마지막 만남 장면이다. 청와대로 호출된 그에게 박정희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언급하며 설득을 시도한다. 메이지 천황 체제가 일본 현대화의 토대가 됐듯이 한국도 ‘문화적, 사회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주인공 아버지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주인공 아버지는 ‘나라를 구하겠다고 맹세한 뒤 오히려 파괴하고 있었다’며 그를 ‘괴물’이라 칭했고 깊은 배신감을 토로했다.
두 사람의 경력도 닮았다. 김 회장은 골드만삭스 출신으로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 금융시장에 참여했고, 대준 역시 IB 출신으로 같은 시기 한국에 온다. 김 회장이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4녀 박경아 씨와 결혼했다면, 대준은 방산그룹 회장 딸인 독일 유학파 첼리스트 지연과 결혼한다. 박경아 씨는 미국 파슨스 출신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소설 속 일성그룹과 현석은 각각 삼성그룹과 이재용 회장과 겹쳐 보인다. 하버드에서 대준과 만나는 현석의 설정은 하버드 대학원 출신인 이재용 회장을 연상시킨다. 일성그룹은 전쟁 중 일본에서 라면을 수입해 첫 재산을 모았고 이후 섬유 공장을 인수했다고 묘사된다. 세계 2위 반도체 제조업체인 일성전자를 주축으로 철강, 건설, 조선, 가전을 아우르며 자동차까지 진출한 재벌로 그려진다. 그룹 컨트롤 타워인 ‘전략기획실’이 ‘실’로 불리며 한 통 전화로 계열사 CEO들을 움직이는 조직으로 묘사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현석은 본래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경영인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나, 형제간 경영권 다툼은 이 회장과 크게 연관이 없어 보인다. 현석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숙명적 압박감을 느꼈고, IMF라는 외부 충격과 함께 몰락하게 된다.
이 소설의 핵심은 한국 재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25년 전 이미 한국 재벌의 문제점을 여러 사건을 통해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는 재벌 포트폴리오 조정을 도왔던 초기 MBK 행보와는 상반된 시각이다.
소설은 재벌가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현석은 클럽을 전전하며, 그룹이 제작하는 영화의 여배우들이 술자리에 동석해 접대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재벌 모델의 핵심은 왕조적 승계다. 모든 그룹은 부자에서 아들로, 또 그의 아들로 가부장적 방식으로 지배력을 넘긴다. 장남에서 장남으로. ‘이것이 한국적 방식'이다”라는 현석 말에 대준은 “비즈니스 스쿨에서 우리가 배운 것과는 다르다”고 반박한다. 이에 현석은 “가족 왕조는 실력주의의 적이다”라며 가볍게 넘긴다.
소설에서 재벌 2세와 3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대준이 근무하는 IB 서울사무소 직원 입을 통해 전달된다. 직원인 준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재벌 2, 3세들이다. 세대를 거치며 재능이 희석되고 가업에 대한 열정도 사라졌다”면서 “그럼에도 그들은 대를 이어받아 사업을 운영하겠다고 고집한다”고 지적한다.
이어 준은 “모두가 그들의 무자격을 알면서도, 복잡하고 법적으로 의심스러운 승계 과정을 통해 회장이 된다”며 “자유기업 체제라면 자본은 부실한 기업에서 빠져나가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흘러가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한다.
가장 신랄한 비판은 마지막 부분에서 나온다. 준은 “최악은 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그저 운 좋은 ‘정자 클럽’ 회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신이 3루타를 쳐서 거기 도달한 것처럼 착각한다”는 야구 비유로 재벌 세습 부조리를 꼬집는다. 이 말은 NFL 레전드 베리 스위처가 해서 유명해진 말로, 한국 드라마 ‘스토브 리그’에도 중요한 대사로 등장한다.
재벌들의 편법적 경영권 승계도 날카롭게 파헤친다. 상장회사인 일성그룹은 지분이 부족하고 상속세도 높은 상황에서 “창의적인 방식으로 승계를 조율했다”고 묘사된다. 시장가 이하로 발행한 교환사채를 일성증권의 대출로 현석과 동생이 매입하는 방식이다. 이에 대해 현석은 ‘우리 소유를 지키기 위해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게 만든다. 우리는 교환사채를 전환했고 결국 주력 사업인 전자와 생명보험의 지배지분을 얻었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이다’라고 정당화한다.
정리하면 김병주 회장 소설 속에서 재벌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소유와 지배의 괴리다. 소설 속 일성그룹은 5%도 안 되는 지분으로 전체 그룹을 지배한다. 둘째, 불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다. 모든 결정이 총수 가족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뤄진다. 셋째, 이해관계자들의 권리 무시다. 왕족인 재벌들을 위해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물론, 소액주주들의 이익도 무시된다.
이처럼 재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오퍼링스’를 재벌과 협업하던 김 회장이 출간한 이유는 무엇일까. 2020년 출간 시점은 한국 재벌 체제의 중대한 변화기와 맞물린다. 재벌 3~4세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가문의 결속력은 약화되었고, 이는 사모펀드(PE) 등 외부 자본이 개입할 수 있는 틈새를 만들어냈다. 재벌 2세대까지는 서로를 잘 아는 끈끈한 관계였지만, 4세대로 내려오면서 그들은 점차 남보다도 서먹한 ‘먼 친척’ 관계로 변질됐다. 실제로 ‘오퍼링스’ 출간 이후 김 회장은 2023년 한국앤컴퍼니그룹 공개매수와 2024년 고려아연-영풍 분쟁에 연이어 참여하며, 이러한 재벌 체제의 변화를 포착해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군주와 독재자의 거대한 망상과 그들의 불가피한 몰락’이라는 소설 속 묘사는 현재 김 회장이 한국 재벌들에게 던지는 경고와 닮아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이 일성그룹의 몰락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체된 일성그룹의 전자제품은 ‘일렉트론’이라는 새 이름으로 시장에서 판매되고, 일성자동차는 채권단이 중국 기업에 매각했으나 전 직원 고용을 보장받았다. 이는 기업의 존속 자체보다 더 많은 이해관계자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현재 MBK 행보는 어쩌면 김 회장이 생각하는 ‘창조적 파괴’의 실천이 아닐까. 특히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서 MBK는 단순한 지배권 다툼을 넘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강화와 주주가치 제고, 지배구조 개선 등 구체적인 혁신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 MBK의 도전은 매우 상징적이다. 40조 원이 넘는 운용자산을 바탕으로 MBK는 더 이상 재벌의 조력자가 아닌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소설에서 그려진 것처럼,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을 위한 시도다. 흥미로운 것은 10대에 한국을 떠난 김 회장의 모순적 애정이다. 소설 속에는 ‘한국을 떠나온 뒤에도 계속해서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른다. 모두가 떠났는데도. 떠났다면 왜 그것을 뒤로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그의 소설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 필요성을 예견했다면, 현재 MBK의 행보는 그 변화를 실현하려는 구체적 시도로 보인다. 재벌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이제 실제 행동으로 구현되고 있다. 결국‘오퍼링스’는 단순한 소설이 아닌, 행동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일종의 선언문이었던 건 아닐까.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