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실·현관 각각 쓰러진 채 발견, 9일간 시신 방치…타살·침입 정황 없어 약물·식중독 등 의심도
[일요신문] 할리우드의 별이 졌다. 아카데미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전설적인 배우 진 해크먼(95)이 지난 2월 26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비록 고령이었다고는 하지만 쓰러져 있던 장소나 주변 상황을 보면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아내인 벳시 아라카와(65)와 반려견 세 마리 가운데 한 마리도 함께 집안에서 숨져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한날한시에, 그것도 반려견까지 같이 생을 마감한다는 건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더욱이 시신이 열흘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도 사망과 관련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에 수사당국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에 착수한 상태며, 심지어 타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과연 그날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배우 진 해크먼과 아내 벳시 아라카와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돼 사망 원인을 두고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2003년 1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참석한 해크먼 부부. 사진=AP/연합뉴스“젠장, 젠장! 방금 집안에서 죽은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요!”
지난 2월 26일,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의 911로 한 통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 남성은 “움직이지 않아요. 빨리 사람을 보내주세요!”라고 재촉했다. 주택단지 유지보수 관리 직원이었던 그가 창문 너머로 발견한 시신은 다름 아닌 해크먼과 그의 아내 아라카와였다. 부부의 집을 찾았다가 창문을 통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황급히 911에 신고 전화를 걸었던 것.
출동한 경찰과 소방당국이 해크먼의 시신을 발견한 곳은 머드룸(외출 후 흙을 털고 들어올 수 있도록 외투를 걸어 놓는 공간)이었다. 해크먼은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으며, 주변에 선글라스와 지팡이가 나뒹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외출 후 돌아와서 쓰러진 것으로 추정됐다. 반면 아라카와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1층 현관문 옆에 있는 욕실 바닥이었다. 시신 옆에는 소형 난방기가 떨어져 있었고, 주변에는 처방전 알약통에서 쏟아진 알약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한 욕실 안에 있는 케이지에서는 부부가 키우던 반려견인 열두 살 된 붉은색 오스트레일리안 켈피 믹스견인 ‘진나’의 사체도 발견됐다. 독일 셰퍼드인 ‘베어’와 아키타-셰퍼드 믹스견인 ‘니키타’ 등 다른 반려견 두 마리는 당시 샌타페이의 한 반려견 보육센터에 머물고 있었으며, 현재 모두 건강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발견 당시 해크먼 부부의 시신은 모두 부패한 흔적이 뚜렷했다. 얼굴은 부어올라 있었으며, 손과 발은 부분적으로 미라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시신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뉴멕시코 사막 지역의 차갑고 건조한 기후가 시신의 피부와 조직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확한 사망 시점은 4~6주일 후에 나올 부검 결과를 살펴봐야겠지만, 현재 경찰은 2월 17일 전후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유인즉슨, 해크먼이 착용하고 있던 심박동기가 마지막으로 심장 박동을 기록한 날짜가 2월 17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사망하고 9일이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크먼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한 점은 사망 시점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먼저 사망했는지도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만일 해크먼이 심장마비 등의 이유로 먼저 쓰러져서 자연사했다면, 아내가 신고를 하거나 도움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부부가 같은 날 동시에 자연사할 확률은 더더욱 낮은 게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동반 자살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 역시도 가능성이 낮기는 마찬가지다. 코네티컷주 법의학사무소의 제임스 길 법의학자는 ‘피플’을 통해 “동반 자살 가능성은 낮다. 그런 경우에는 보통 침대에서 시신이 함께 발견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시신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발견됐다”며 이를 배제했다. 이어서 그는 “아마도 해크먼이 먼저 쓰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고, 심박동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또한 해크먼이 죽기 직전까지 자기 힘으로 걸어 다녔다는 점도 중요하다. 간혹 병상에 누워 있거나 치매에 걸린 경우, 돌보던 사람이 사망하면 보살핌을 받지 못해 탈수로 죽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건 아니었다”라고 분석했다.
배우 모건 프리먼이 3월 2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료 해크먼을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사진=AP/연합뉴스대체 사망 원인은 뭘까. 가장 유력한 사망 원인으로 지목됐던 일산화탄소 누출로 인한 질식사 가능성은 현재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부부의 시신과 반려견의 사체에서 치명적인 가스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안팎의 가스 배관을 점검한 뉴멕시코 가스회사는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소방당국 역시 “일산화탄소 누출이나 중독 징후, 그 어떤 의심스런 정황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다만 집안의 가스레인지에서 미세하게 가스가 누출된 흔적이 있었으나, 이는 치명적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럼 혹시 타살일까. 경찰은 아직 타살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총상이나 외상이 없다는 점, 그리고 비록 현관문이 살짝 열려있긴 했지만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는 점이 타살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다. 더욱이 몸싸움 흔적도 없고, 집안에서 없어진 물건도 없었다. 샌타페이 카운티 보안관인 애덤 멘도자는 “현재 확보된 증거만 놓고 본다면 타살의 흔적은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욕실 카운터 위에 처방약이 흩어진 채 발견됐다는 점에서 약물이나 독극물에 의한 사망도 의심하고 있다. 현장에서 경찰이 수거한 약물들은 혈압약인 딜티아젬, 갑상선약, 타이레놀 등 세 가지였다. 멘도자 보안관은 ‘투데이쇼’ 인터뷰에서 “처방약 병이 ‘우려스러운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면서 “독성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몇 달이 걸릴 수 있다. 아마 사망 원인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식중독을 의심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전직 FBI 요원인 빌 데일리는 ‘폭스뉴스’에서 식중독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독극물, 특히 음식에 의한 식중독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경찰은 집안 쓰레기통과 냉장고를 조사하고 있으며, 가능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혹시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됐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에 대해 해크먼의 딸인 레슬리(58)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건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 연세에 비해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최근 몇 달간은 큰 수술을 받은 적도 없었다”라며 부인했다. 그러면서 또한 “최근에는 꾸준하게 필라테스와 요가를 해오셨고, 일주일에 몇 번씩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은 상태였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친구들과 이웃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보인다. 그가 마지막 몇 달 동안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거의 집에 은둔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부부의 친구인 대니얼과 바버라 레니한은 ‘피플’을 통해 “해크먼은 자전거 타기를 중단하고 집에만 있었다”라고 전했는가 하면, 또 다른 친구는 ‘폭스뉴스’에 “해크먼은 2020년부터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라고 전했다. 또한 한 이웃은 “특히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면역력을 보호하기 위해 더 은둔적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해크먼은 2004년 은퇴한 뒤 아내와 함께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의 프라이빗 주택단지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사진=AP/연합뉴스부부의 시신이 열흘이 다 되도록 발견되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철저한 은둔 생활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해크먼 부부는 샌타페이에서 약 8km 떨어진 구불구불한 협곡 도로에 위치한 프라이빗 주택단지에 거주했다. 2004년 할리우드에서 은퇴한 후부터 두 번째 부인인 아라카와와 함께 이곳에서 살았으며, 외부와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크먼의 이웃들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수년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부부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약 5년 동안 이웃주민으로 살았던 제임스 에버렛은 “해크먼 부부의 집에도 대문이 있고, 우리 집에도 대문이 있어서 서로 마주친 적은 없다”고 말했는가 하면, 20년 동안 옆집에 살았던 버드 해밀턴은 “해크먼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적은 딱 한 번 있었다”면서 “그들은 사생활을 소중히 여겼다. 나는 그러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해크먼은 평생 동안 대중의 시선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그에게 안식처였다”라고 했다.
실제 할리우드를 떠난 후 개인 전화번호나 이메일 주소도 없앨 정도로 노출을 꺼렸던 해크먼은 은퇴 후 무려 20년 동안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친구들은 아라카와를 통해서만 해크먼과 연락할 수 있었다. 설령 친구나 지인을 만난다고 해도 부부끼리만 아는 비밀 수신호를 통해 아라카와에게 대화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를 알려주곤 했다. 해크먼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을 때 아라카와가 간호사로 변장해 파파라치가 병원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부부는 철저하게 세상을 등진 채 살았다. 심지어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기 전까지 몇 달 동안은 자식들과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한편 40년간 연기 경력을 쌓았던 해크먼의 순자산은 8000만 달러(약 115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슬하에 자녀로는 첫 번째 아내 페이 말테제와의 사이에서 낳은 1남 2녀가 있다. 하와이에서 자란 클래식 피아니스트인 두 번째 아내 아라카와는 198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의 한 스포츠센터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후 함께 살기 시작한 두 사람은 1991년에 결혼한 후 34년 동안 결혼 생활을 이어왔다.
소심한 소년에서 남우주연상 배우로…할리우드의 전설 진 해크먼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진 해크먼은 수십 편의 드라마, 코미디, 액션 영화, 연극 무대에서 악역, 영웅, 반영웅을 넘나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선보였다. 결코 미남형 배우는 아니었지만 강인한 남성미와 개성 넘치는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다섯 차례 올랐으며, ‘프렌치 커넥션’과 ‘용서받지 못한 자들’로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작가로 활동하면서 세 권의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진 해크먼은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렌치 커넥션’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AP/연합뉴스해크먼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13세 때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고, 몇십 년 후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어머니마저 취한 상태로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던 중 매트리스에 불이 붙어 사망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이런 아픈 기억들은 오히려 훗날 해크먼의 연기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이를 회상하면서 해크먼은 ‘뉴욕타임스’에 이렇게 말했다. “문제가 많은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너무 소심한 성격 때문에 배우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연극반 오디션조차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입대해 5년간 군복무를 한 그는 26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배우의 꿈을 좇기 시작했다. ‘패서디나 플레이하우스’에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 해크먼은 그곳에서 더스틴 호프먼을 만나 친구가 됐다. 두 사람 모두 소심한 성격이었던 탓에 아웃사이더였고, 그렇게 단짝이 됐다. 하지만 해크먼은 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1년 만에 연극학교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학교를 떠난 해크먼은 뉴욕으로 이주해 연극 무대에 오를 기회를 엿보며 생계를 이어갔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도어맨으로 일할 때였다. 해병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 남성이 해크먼을 지나치며 비꼬듯 던진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이 남성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하면서 지나갔다. “해크먼, 정말 한심한 놈이네.” 이 말 한마디는 해크먼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하지만 이 굴욕감은 그를 더욱 독하게 노력하도록 만든 계기가 됐다. 지독하게 노력한 결과 몇 년 후 그는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고, 비록 단역이지만 TV 드라마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7년, 마침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 워런 비티의 형제 역으로 출연하면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4년 뒤에는 ‘프렌치 커넥션’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톱스타 반열에 올라섰다. 특히 대중들에게는 ‘슈퍼맨’ 시리즈의 악당 렉스 루터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정작 해크먼 본인은 이 역할이 자신의 커리어를 망쳤다며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성공에도 해크먼은 생전에 대작 영화가 주는 부담과 관심을 버거워 했다. 이런 관심이 오히려 연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리고 2004년, 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후 지쳐있던 그는 당시 의사가 심장 건강을 걱정하며 스트레스를 줄이라고 조언한 후 은퇴를 결심했다. 이에 대해 해크먼은 2009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 마지막 짐”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은퇴한 후 조용히 은둔자 생활을 했던 해크먼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그는 생전에 자신을 가리켜 “사람들이 그저 괜찮은 배우로 기억해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해크먼의 친구인 바버라 레니한은 “그는 ‘괜찮은 배우’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배우였다”라고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