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으로 새긴 글자, 문화로 꽃피우다

물론 불경 내용을 정리하고 경판을 검수한 승려들을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의 손길이 녹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직접 목판에 글자를 새긴 장인들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이처럼 나무판에 글이나 그림을 새기는 것을 각자(刻字) 또는 서각이라 하며, 그 고유한 기술을 지닌 장인을 일컬어 각자장(刻字匠) 또는 각수(刻手)라 한다. 우리나라는 1996년 각자장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우리나라의 목판 인쇄가 어느 시기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8세기 중엽에는 목판 인쇄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목판 인쇄에 대한 수요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초기에는 왕실의 보호 아래 불교 경전 간행이 이루어졌고, 이외에도 ‘훈민정음’ ‘삼국사기’ ‘시용향악보’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목판으로 찍어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교서관(인쇄 등을 관장하는 관서)에 14명의 각자장을 배치해 목판 제작 등을 담당하게 한 것으로 나타난다.
각자장의 역할은 비단 목판 제작에만 그치지 않았다. 궁궐의 건물이나 사찰, 사가의 건축물에도 나무판에 글자를 새겨 현판을 거는 것이 일반화되었는데 여기에 각을 하는 작업 역시 각자장의 몫이었다.

사라지다시피한 각수 기술을 되살린 이는 1996년 초대 각자장 보유자로 지정된 오옥진 선생이었다. 1970년대부터 선대의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전통 각법을 재현하여 그 맥을 잇게 되었다. 각자장 현 기능보유자인 김각한 선생은 그의 제자이기도 하다.
전통 각자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인쇄를 목적으로 목판에 글자를 좌우 바꾸어 새기는 것을 ‘반서각’이라 하고, 궁궐 건물이나 사찰, 재실 등에 거는 현판용으로 목판에 글자를 그대로 새기는 것을 ‘정서각’이라 한다.
각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를 마련해 ‘치목’을 해야 한다. 치목이란 나무를 선별하고 건조한 뒤 크기에 알맞게 자르고 다듬는 작업을 일컫는다.
그 다음 작업은 ‘배자’(配字), 각자할 글씨 원본 또는 사본을 나무판에 붙이는 과정을 말한다. 붓으로 글자를 쓸 때에는 일일이 자로 재서 쓸 수 없으니, 쓰다 보면 행간과 자간이 달라지게 마련인데, 이를 재조정하여 균형과 통일감을 꾀하는 것도 각자장의 일이다.

배자에 이어 본격적으로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 작업이 진행된다. 현판용으로 각자를 할 때에는 어떤 각법이든 글자 선을 살려주고 글자의 문체를 입체적으로 살려주는 데 주안점을 둔다. 반면 인출용 목판의 각자는 작은 획의 탈락도 조심해야 하는 칼놀림의 정교함과 함께 글자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가 뛰어나야 한다. 서예와 한자에 대한 조예가 깊어야 진짜 각자를 할 수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각자장이라 하더라도 한 번의 새김질로 완성되는 각자 작업은 없다. 인출용 각자의 경우 매번 먹칠을 해 종이에 찍어 보면서 여러 번 다듬고 교정해야 비로소 좋은 글자가 나온다. 오랜 시간 한 자, 한 자 새겨나가는 정성과 인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반서각을 할 때에는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주며 글자를 새기는데, 그러다 보니 각자장의 왼손 엄지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다. ‘혼을 담아 새긴다’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닐 듯하다.
자료 협조=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