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경영 일선 물러나고 ‘장녀’ 김주원 부회장 존재감 커져…DB그룹 “환경 변화에 따른 조치일 뿐”

눈길을 끄는 것은 오너일가인 김남호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점이다. 이번 인사를 통해 김남호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돼 경영자로서의 역할이 축소됐다. 김준기 창업회장의 장남 김남호 회장은 2020년 회장직에 오른 후 그룹을 이끌었다. 회장 선임 약 5년 만의 퇴진인 셈이다. 1975년생인 김남호 회장은 50세의 나이에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됐다.
이를 두고 부자간의 이상 기류가 표면 위로 올라온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수광 회장은 김준기 창업회장의 측근으로 분류된다. 1944년생 이수광 회장의 나이는 81세로 김준기 회장과 같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동문이기도 하다.
김남호 명예회장은 김준기 창업회장의 빈자리를 갑작스럽게 채우면서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김준기 창업회장은 2017년까지 회장직을 맡으며 DB그룹(당시 동부그룹)을 이끌었지만 성추문이 발생한 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전문경영인인 이근영 전 금감원장을 DB그룹 회장으로 내세웠다. 이근영 회장 체제 2년여 뒤 김남호 명예회장이 회장직에 올랐다. 시장에서는 김남호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넘겨받았다고 판단했다. 김준기 창업회장이 회장직을 내려놓은 시점에 이미 김남호 회장이 최대주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준기 창업회장이 2021년 미등기 임원으로 회사에 복귀하면서 심상찮은 기류가 감지됐다. 결과적으로 김준기 창업회장과 김남호 명예회장 간 승계가 마무리되지 않은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경영권을 둘러싼 부자 갈등 가능성이 제기됐다.
2021년 김준기 창업회장의 부인 김정희 씨가 별세했을 당시 가지고 있던 DB아이앤씨 지분(1.1%)에 대한 상속에서 김남기 명예회장은 배제됐다. 그의 누나 김주원 DB 부회장과 김준기 창업회장이 각각 0.41%, 0.68%의 지분을 받았다. DB아이앤씨가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던 곳이라 다양한 시각이 나왔다. 통상 승계가 마무리된 상황에서 윗세대의 지분이 다시 증가하는 사례는 드물다. 향후 다시 지분을 아랫세대에 넘겨줄 때 증여세 등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 김남호 명예회장이 완전히 그룹을 장악하지 못한 만큼 부자간 경영권 갈등이 언제든지 가능한 구조다. DB아이앤씨 지분 구조를 보면 김남호 명예회장은 지난 3월 기준 16.83%의 지분을 확보한 최대주주다. 김준기 창업회장은 15.91%로 2대주주이지만 김남호 명예회장와의 격차가 1%포인트(p) 미만이다. 김준기 창업회장은 지난 2022년 DB김준기문화재단이 가지고 있던 DB아이앤씨 지분 4.3%를 인수해 지분율 크게 끌어올리면서 김남호 명예회장과 지분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여기서 ‘키맨’은 김주원 부회장이다. 김준기 창업회장의 우호지분으로 분류되는 김주원 부회장도 지분 9.87%를 가지고 있다. 김주원 부회장은 과거 미국법인에서 경영에 참여했지만 김준기 창업회장이 갑작스럽게 경영권을 내려놓은 이후 한국법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부녀간 관계가 우호적으로 해석되는 만큼 그룹 장악력은 김준기 창업회장이 우위에 있다는 시각이 중론이다. 김주원 부회장은 2021년에는 DB하이텍 사장을 맡았고 2022년에는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꾸준히 존재감을 강화하고 있다.
DB그룹의 금융계열사 지배구조 최상단에 있는 DB손해보험도 비슷한 구도다. DB금융 계열사는 DB손해보험이 DB금융투자, DB생명보험, DB저축은행, DB자산운용 등을 직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DB손해보험에서도 김남호 명예회장이 9.01% 지분율로 최대주주다. 김준기 창업회장은 5.94%로 격차가 3%p 이상 차이 난다. 김주원 부회장의 지분 3.15%와 DB김준기재단의 지분 5%를 더하면 지분 격차가 다시 5% 이상 김준기 창업회장이 유리한 구도가 된다.
김주원 부회장의 존재감이 앞으로 더욱 부각될 것이라는 전망된다. DB손해보험은 오너일가 지분율이 23.25%로 낮다. DB손해보험은 자사주를 활용해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새다.
DB손해보험은 발행주식 7080만 주 가운데 1075만 주의 자사주를 가지고 있다. 전체 발행 주식의 15.19% 수준이다. 외부 투자자가 경영권을 노리고 지분인수에 나서도 우호세력에게 자사주를 넘기는 방식으로 오너일가의 지배력 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자사주를 우호세력에 넘기는 것은 어려워질 전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가족 간에도 돈을 두고 법적 분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DB그룹 경우도 지배주주 일가(오너일가)가 경영권을 두고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충분한 만큼 향후 갈등이 수면 위로 오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해 DB그룹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이번 인사는 도요타와 같이 경영환경에 따라 전문경영인과 대주주 일가가 번갈아가며 경영을 맡는 시스템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며 “DB그룹의 경영권은 창업자이자 동일인인 김준기 창업회장 중심으로 확립되어 있으며, 가족 간 경영권 분쟁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박호민 기자 donkyi@ilyo.co.kr